성경에 나오는 사도란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직장 가운데로 믿음 안에서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일터사도라고 생각해도 될 거에요. 멋진 말로 일터사도라 하는 거고, 사실 다른 말로는 그냥 직장인이에요.

직장인으로서 직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우리 교회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하고 또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면서 나는 예수님께로 모든 것을 다 올인 하겠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중에서 청년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는 것과, 교회에서 모든 시간을 다 하나님께 내어드리고자 하는 그런 마음하고 거기에서 좀 두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계속 있어야만, 교회 안에 계속 있고, 모든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교회에서 그냥 하루 종일 지내고, 그래야만 하나님하고 가까운 것 같고 계속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같고 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다 바쁘고 그러다보면 가끔 하나님을 잊기도 하고, 바쁜 생활로 인해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걸 두려워하는데, 사실은 그런 두려움 그 자체가 우리 청년들에게 있어서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좀 승화되어야 될 그런 것이에요.

 

변승우 목사님께서 아주 정확하게 영성에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해놓으셨는데 그게 맞아요. 바로 영성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거든요. 예수님을 닮는 것이 영성인데, 교회에서 아무런 어떤 거치는 것이나, 부딪치는 것이나, 마음의 갈등이나, 이런 것 없이 예수님을 그냥 닮기 위해서 애쓰고,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하는 그런 모습 가운데서는 자기가 자기를 봐도 마치 뭔가 예수님을 닮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만, 교회 안에 그렇게 있는 사람은 절대 사도가 아니예요. 알고있죠? 실제로 세상 가운데 나와서 예수님께서 세상 가운데 제자들을 보낸 것처럼 이 세상 가운데 보내진 사람이 사도예요.

 

삶 가운데서 세상 가운데서, 세상 가운데로 보내진 사람이 사도인데, 그렇게 세상 가운데로 사도라고 보냈는데, 그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일종의 허상이예요. 자기가 교회 안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 나는 예수님을 닮은 것 같다는 그런 예수님을 닮은 성품들이 교회 안에서 발견한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세상 가운데서 드러나지 않으면 그건 다 허상이예요, 허상.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키워진 그런 사람들의 영성은, 이 세상의 거친 세상 가운데서 다듬어지고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닮아간 그 영성을 결코 따라가지 못해요.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보호만 받으면서 계속 있는 그 사람의 영성은 세상 가운데 나오면 결코 그것이 유지되지 못하거든요.


삶 가운데서 나타내지는 영성! 사람과의 관계나 직장이든 가정이든 그런 가운데 드러나지지 않는 그런 영성은 다 허상이예요, 허상. 그래서 자기가 진짜 예수님을 닮았는지 다시 말해서 내가 영성이 있는지 보려면, 거친 세상으로 들어와서 그 가운데서 그게 유지되는가를 봐야 되요. 그러지 않고 교회 안에서만 있는다면, 그 안에서야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터사도로 부르셨다면 그 곳에서 그런 것이 드러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 허상이고, 헛것이예요.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면 혼자 살아라. 대신 정말로 예수님을 닮기를 원한다면 결혼을 해라'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예수님을 닮는 것이 영성이라고 담임 목사님께서도 말씀 하셨지만, 예수님을 진짜로 닮는다면 삶 가운데서, 즉, 부부와 자녀와 부모, 이런 모든 관계 쉽게 말하면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우리가 전혀 부담 갖지 않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보일 수 있는 그런 관계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드러나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영성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죠. 모두가 위해주고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그런 곳에 있으면 자기가 개념 속에 있는 그런 것이 자기 삶인 줄 알꺼예요. 생각 속에 있는 것, 자기가 단지 알고 이해하고만 있는 것이 자기 삶으로 오해할 수 있다구요.

그런데 삶과 생각은 전혀 다른거예요. 삶 가운데서 자아가 온전히 죽어진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영성이죠. 그래서 그런 모습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빛으로 존재하고 소금으로 존재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그런 곳에 던지고, 변화되어지고, 다듬어지고 하는 그런 애씀은 결국 자기가 선택하는거죠. 변목사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자아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면 실제로 해야 되어요. 행해야 돼요. 마음 가운데서 생각 가운데서 원하고 있지만, 드러나지지 않으면 그것은 실제로 자기 것이 아닌 거에요. 그냥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성프란시스코의 자서전에도 나오지만 자아가 죽는 것은 정말로 시체가 되는거예요. 시체가 된다는 것은 사장 자리에 앉혀놓든 말단 대리나 말단 사원자리에 앉혀놓든 시체는 자기가 거기 있는 줄 모를꺼예요. 그 시체에다가 누가 발길질을 하든, 누가 침을 뱉든, 그 시체는 그걸 모르잖아요. 자아의 죽음이란 것은 실제적인 거예요. 정말 자기가 시체가 되어서 누가 뭐라 그러던 누가 발길질을 하던 침을 뱉던 손가락질을 하던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것이 진짜 죽은 거예요. 만일 거기에서 욱하거나 올라오거나 하는 그런 게 남아있다면 아직 안 죽은거에요.

담임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은 어떤 분에 대해, 혹은 예수님을 닮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가 도전을 받고 감동을 받았을 때 그 감동받고 도전받고 이해하는 그것이 내 영성이 아니거든요. 그렇죠? 그것은 그냥 우리가 생각 가운데 마음 가운데 관념 가운데 들어온 거에요. 그것은 내 영성이 아니에요. 내 영성이 되려면 그것이 내 삶이 되고 그것이 나에게서 나타나고 보여져야만 그것이 내 영성인거예요.

 

우리가 실제로 삶의 현장, 다시 말해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자기가 부딪혀가는 그런 관계들 가운데서 정말로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부딪히면서 기다려야 돼요. 에스겔서에 나온 것 같이 일천척 기다리고, 또 일천척, 그 다음에 또 일천척, 이 시간들이 이렇게 흘러가야 되는데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거나 혹은 가정에서 그런 거친 환경 가운데 내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발목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알거나 이해하거나 해도 그 영성이 결코 내 것이 되지 않잖아요.

 

모든 것을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돼요. 청년들에겐 모든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에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어하고 정말로 열정이 있는 일이라면 나는 직장을 바꿔도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마음이 끌리고 정말로 나는 이 일에 목숨을 걸어보고 싶은 일이라면.

내 부르심이 아니라 생각하고 옮기는 게 아니라, 나에게 안 맞는다고, 적성에 안 맞는다고 옮기는게 아니라면, 내가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나는 그 일을 찾아서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러나 그것이 아닌데 단지 내가 힘들다고 또 내가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렵다고 직장을 옮기려 한다면 그건 아니예요. 그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정말로 어떤 새로운 단계의 믿음과 새로운 단계의 영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거기 두신 거에요. 그래서 그런 곳에는 있어야 돼요.

내가 정말 마음 가운데서 불타 올라서 뜨거운 열정과 정열이 타오르는 일이라면 바꿔도 돼요. 나는 이 일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 성공이 아니라 실패해도 좋아. 실패해도 좋으니 정말 꼭 해보고 싶어, 그렇다면 해요. 나는 그러면 바꾸라고 권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성공과 실패 이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 내 열정이 있다면 해야죠. 그래서 거기서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니까. 그런 일이라면 바꿔도 돼요.

그러나 내가 힘들다고 바꾸는 것은 그건 아니에요. 내가 견디기 어렵다고 또 내가 인간관계가 버티기 어려워서 이거는 아닌 거 같다라면, 이런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셔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닮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두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직장을 바꾸는 일은 자기가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지를 봐야죠.

 

청년들에게는 과정을 생략하고 단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그런 생각들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꿈꾸는 그 모습으로 바로 뛰어넘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뛰어넘으면 반드시 무너져요. 이게 차곡차곡 다져가며 올라가지 않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삶에서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날 수 있도록. 내가 살아오면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떤 레벨로 올려 가시는 그런 시간이 짧아지는건 전혀 없어요. 절대 없어요.


아까도 에스겔서에 나오는 그 강에 대해서 얘기를 했지만 일천척, 일천척, 일천척. 이것은 반드시 지나가는 과정이예요.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반드시 무너져요. 하나님께서는 과정을 절대로 생략 안 해요. 단지 짧아질 수 있는 과정은 있어요. 그건 뭐냐면 고난이에요. 고난을 통해서만 그 기간이 짧아져요. 고난 말고는 짧아지는 것이 절대로 없어요.


우리 청년들에게 내가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믿음의 길을 조금 먼저 걸었던 신앙의 선배로서 얘기를 해준다면, 그 고난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세요. 정말 어렵지만 절대 물러나지 않고, 그것에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그 고난을 감사와 기쁨으로 인내하고 견뎌내라는 거예요. 바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그 훈련의 기간이 짧아지는 거예요.


나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세월을 좀 더 진짜로 아끼고 싶으면, 훈련의 기간을 짧게 하고 싶으면 어렵지만 자기를 그 고난 가운데로 던져 넣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인지상정상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일이고, 단지 자기에게 닥쳐오는 일들 어렵고 힘들지만 그런 고난들을 절대로 피하지 말고 단지 그 곳에서 버티고 인내하면서 오래 참고, 성경 말씀대로 오래참음과 인내로 그것을 지내다보면 어느 틈엔가 거기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이 과정을 생략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은 절대로 하면 안되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아요. 세상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단련되는 용광로와 같은 그런 곳이기 때문에 거기 있으면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처럼 변화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돼요.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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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믿음설교 받아쓰기 카페에

에녹의영님께서 올려주신 글입니다.

http://cafe.daum.net/gfcs/9AmB/43

by 아름다운 사람 2010. 3. 27.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