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성들 '80대 노인'에게 두근두근? 그 이유는…
젊은 여성들 '80대 노인'에게 두근두근? 그 이유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그 명랑함에 묻는다
기사입력 2011-07-15 오후 6:05:18
조로증에 걸려 80세 노인으로 보이는 17세 소년. 그리고 이 소년을 17세에 낳은 어린 부모의 이야기. 1980년생 젊은 작가 김애란의 첫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펴냄)이 지난 6월 말 출간되고 나서 10일 만에 소설 부분 베스트셀러 1위,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 오르는 등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20~30대 여성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현재 이 책의 구매층은 70퍼센트 이상이 여성, 20~30대 독자다. 평단의 반응도 호평 일색. "운명적인 이야기꾼"(황석영), "비극에서 낙천의 보석을 골라내는 타고난 재능"(성석제), "박수를 아낄 생각이 없다"(신형철) 등…. 김애란이 한국 문단의 차세대 대표 작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이명원이 <두근두근 내 인생>을 꼼꼼히 읽고서 감상을 보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이렇게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은 무엇일까? 그 중에서도 젊은 여성에게 인기를 끄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소설은 정말로 "박수를 아낄" 수 없을 정도로 잘 쓰인 것일까? 이명원의 얘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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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펴냄)은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한 소년의 생애 마지막 1년간의 삶이 주된 시간적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특이한 질병을 짊어진 17세 소년의 어조는 담담해서, 그의 실제 나이가 아니라, 생체 나이로 진술되고 있는 80세의 노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담담한 삶의 마무리를 완성하고 있다.
급성 노화와 죽음이라는 명백한 운명이 두드러진 소설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임박한 비극에 감정 이입을 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작품의 완성도를 문제 삼는 일이란 부수적인 일로 비칠 수 있다. 게다가 이 소년은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하게 책읽기와 글쓰기를 치열하게 지속하는 인물로 서술되고 있어 장엄한 느낌까지 든다. 이 장편에서 병세의 악화와 임박한 죽음 앞에서 주인공의 의지가 작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출구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글쓰기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김애란이 소설쓰기에 부여하고 있는 뜨거운 열정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작중 인물 한아름의 소설 쓰기에 대한 고민은 김애란이 쓴다는 행위에 부여하는 예술가적 자의식의 투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외적 줄거리와 무관하게 일종의 김애란 식 '메타 픽션'이 되는 셈인데, 이것은 지난 연대에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신경숙의 <외딴 방>의 서사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가령 1부 6장에서 김애란은 한아름의 입을 빌어 소설 쓰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피력한다.
이야기를 짓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고루 살피며 문장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였다. (…) 이야기는 자주 멈췄다. 그럴 때면 홀로 북극에 버려진 펭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막막하고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묻고 또 묻고, 한 번 더 해 달라 졸라댔다. (89쪽)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귀가 잘 안 맞았다. 기억하는 것도 조금씩 어긋났고, 해석하는 것도 달랐다. 어머니는 한 대수가 자길 쫒아 다녔다고 하고, 아버지는 최미라가 먼저 꼬리를 쳤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서 처음 노래를 부른 순간도, 두 사람이 입을 맞춘 순간도 두 사람 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입장을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어머니의 편도 아버지의 편도 아니었다. 나는 이야기의 편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진짜 필요한 순간에 어머니의 편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93쪽)
이 작품 속에는 이런 방식의 글쓰기에 대한 진술이 자주 등장하고, 주인공인 한아름이 죽음에 다가갈수록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된다. 나중에 사기로 밝혀지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 한아름이 거의 유일하게 사춘기적 이성애를 자각하게 하는 '이서하'와의 관계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전자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이다. 편지 쓰는 일에서도 한아름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종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발견하고, 보는 즉시 '어우' 손사래 쳤던 글들을 내가 쓰고 있었다. 그것도 문체가 제 각각인 게 어느 것은 도도한 초등학생이 쓴 산문 같고, 또 어떤 것은 인문대 복학생이 쓴 잡문 같았다." (199쪽)
대학을 가 본적 없는 한아름이 자신의 문체를 위와 같이 분석하는 것은 어색하다. 잡문이라니.
사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는 '낱말 카드'를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출발한다. 한아름의 몸과 마음이 쇠락해갈수록 말을 통한 상상과 문장들의 유연한 활공은 더욱 강렬해지는데, 대단원의 결말을 이루는 것은 그 자신의 기원을 추적해가는 것을 골간으로 한 한아름의 자작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에서이다. 각각의 낱말들을 통해 상상해낸 삶의 질감들이 자신과 나이가 똑같은 17세 당시의 부모들의 낭만적인 만남과 조우하면서, 이 소설은 자못 완결된 장편의 형식미를 획득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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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그렇다면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과연 성공한 장편 소설일까.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몇몇 측면에서 이 소설이 장편으로는 허약한 토대 위에 지어진 집처럼 느껴진다.
읽기의 차원에서는 술술 잘 읽히는 미덕이 있지만, 인물 형상에 있어서 미숙한 처리가 두드러지고, 소설의 초반부에는 자못 탄탄한 긴장감을 보여주지만 3부에 이르면 소설의 구조가 급격하게 이완되는 양상을 보인다. 장편 소설의 플롯이라는 게 요즘처럼 이완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다차원적인 복잡성과 파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들 역시 단편과 장편의 질적 차이에 대한 치밀한 고민 없이 시간이 지나면 장편으로 자연스럽게 널뛰기 하는 관성에도 기인하는 현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한 문단만 생략해도 전체 구조가 완전히 흔들리는 식의 완결된 구성을 요구하는 것이 현대에 있어서는 무리라고 할지라도,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중반부를 지나면 애초에 견지했던 소설적 긴장을 찾아보기 어렵다가, 종결부에 이르러 가까스로 그것을 회복하고 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플롯의 안정된 균질성이 지속되지 않는 상황에서 에피소드와 메일 형식을 통한 독백, 인물들의 어색한 유머가 반복되는 것은 약점이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다보면, 인물 성격의 대비 효과가 주된 서사적 장치로 활용되는 예를 자주 발견한다. 아이들은 의뭉스러운 성숙함을 보여주는 반면, 어른들은 유아기적 퇴행에 가까운 발언과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장 씨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이 소설 속의 성인들은 동화나 명랑 만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철없는 상황의 미숙성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몸과 마음이 늙었으나 이제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17세 소년과 기묘하게도 유년기의 동심과 명랑성을 유지하고 있는 어른들의 반어적 대조가 이 소설의 동화적 성격을 도드라지게 한다.
나는 소설이 아니라 동화라고 말했는데, 사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의 빼어난 흡인력의 근거는 이 인물들의 통념적 성격의 의식적인 뒤집기에 있으며, 이것은 동화 양식에서 선용되는 인물 형상화 방식의 영향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동화적 성격 형성의 구도가 가장 관습화된 서사적 양식으로 고착된 것은 한때 유행했던 일본과 한국의 명랑 만화에서였을 것이다.
이것은 동화도 만화도 아닌 소설이지만, 에필로그 이후에 등장하는 한아름의 <두근두근 내 여름>이 본격 소설에 해당하는 통일된 인상을 보여준다. 반면,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 이르는 이 소설의 거의 대부분의 분량에서, 장편 소설에 맞춤한 성격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인물은 '이서하'라는 이름으로 한아름에게 접근했던 30대 중반의 시나리오 작가와 여고 시절의 엄마에게 <홀로서기>와 빈소년합창단 테이프를 선물했던 채승찬 피디(PD), 그리고 방송 작가 정도다. 이들에게는 성숙한 어른들의, 세속적 삶의 인정하기 힘든 불편한 명암이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현실적으로 발현되고 있어 이 소설의 흠결을 아슬아슬하게 보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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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은 대체로 고달픈 삶의 정황에 포섭된, 그래서 따뜻한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작가 역시 위로와 유머를 중시하는 견해를 자주 노출하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의 주동 인물인 한아름이 우리의 아들,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살려는 의지와 무관하게 처해진 한아름의 가혹한 운명 앞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 고통스럽기 짝이 없을 쇠락과 죽음의 증상들 앞에서, 공포와 불안도 없이, 자기만의 낱말 카드에 몰입하는 주인공의 의연함 앞에서는 어떤 경건함의 심정까지도 느끼게 된다.
모든 유기체들의 한계 상황임에 분명한 죽음의 진전 과정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눈에 뻔히 보이는 다큐멘터리 제작의 상업성과 허위성에 대해서도 분개하지 않으며, 생애 최초로 타인에게 내면을 개방했던 메일 대화 역시 '사기'로 드러난 마당에서도 결코 쉽게 절망하지 않는 한아름의 태도는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주인공 주변에 배치된 여러 인물들은 엄마, 아빠 모두를 포함하여 그 성격이 일종의 '캐리커처'처럼 축소되어 있다.
이런 명랑성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의 인물들은 왜 명랑할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까지 명랑하며, 유머가 필요 없는 상황에서까지 슬랩스틱에 가까운 만담의 주인공이 되는가 하는 의문은 제기해 볼 수 있다. 한아름의 17세가 조로였다면, 아버지의 17세는 유아적이다. 여름날의 사랑으로 덜컥 임신한 아내의 집에 찾아가 장차 장인이 될 사람이 "그래 너는 뭘 잘하냐?" 묻자, 이에 대답하는 말이 "아버님 저는 태권도를 잘합니다"(14쪽)이다. 이를 듣고 "그리고 또 뭘 잘하냐?"고 장인이 다시 묻자, 아빠가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나는 스트리트 파이터를 잘하는데…'라는 것은 골계적인 서술이다.
엄마의 소녀 시절 별명은 '시발공주'였다. 이웃집 장 씨 할아버지는 한아름을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끝나자 그의 집으로 찾아와 "아름아, 방송 봤니"라고 물은 후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리길, "내가 (방송에) 안 나와…" 하고 외친다. 아버지의 17세 시절의 나른한 수음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한 날은 그게 하루에 몇 번이나 가능한지 알아보려는 실험을 하다 자기 성기를 꼭 쥐고 기절한 채 발견되기도 했다"고 서술한다. 이 서술문의 끝에서 작가는 아버지를 한 번 더 동화적으로 만드는데, "아! 인간이 하루 다섯 번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진술은 글쎄, 엄살의 뉘앙스가 강하기는 하지만 역시 유머러스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진술이나 소설 전체의 톤을 고려하면 이것은 작가가 유머를 창작상의 중요한 장치로 활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방송 작가가 한아름에게 "그래서 뭐가 되고 싶어요, 아름인?"이라고 묻자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대책 없는 효자라고 해야 할지, 천성이 낙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나도 '대략 난감'하다. 이것이 어떤 희비극적 상황을 오히려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도 있겠다.
처방전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한계 상황을 유머를 통해 상대화하고 완화시킴으로써 삶과 죽음의 납득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오히려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의도했다고도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판단에 이는 유머의 과잉이다.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웃으라고 권유하는 작가의 서사 장치는 어떤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왜 한아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인들, 심지어는 고통을 참고 있는 그의 부모들마저 이 소설 속에서는 그저 실없이 웃고 떠들면서, 상황의 비극성을 회피하고 있는 건인지 나로서는 알쏭달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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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나 농담이 갖는 순기능은 심리적 압박감과 긴장을 완화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쾌적하게 휘발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면, 그렇게 극중 인물의 고통을 지켜보는 독자의 안타까움 역시 마술적으로 완화되고 쾌적하게 망각된다. 그래서 노화와 쇠락의 명백한 징후가 두드러지는 한아름 대신, "아! 만권의 책을 읽어도, 천수의 삶을 누려도, 인간이 끝끝내 멈출 수 없는 것이 추파겠구나"라고 흐뭇해하는 조숙한 한아름의 잔상이 더욱 오래 남게 된다.
소설 속에서 빈번한 유머와 연약한 골계가 지배적이 되다 보니 신체 연령이 80세로 급격하게 노화되었다는 한아름의 증상도 현실감을 잃게 된다.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주인공의 고통도 독자 입장에서는 관조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묘사되고 있는 혼수상태의 환청은 매우 아름답고 몽환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죽음으로 건너가는 한아름의 장엄한 삶의 완성은 다만 고즈넉하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김애란이 청년기의 명랑과 유머의 세계에서 비극 쪽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셈인가. 현재까지의 소설적 상황을 보면, 물론 그것은 어려워 보인다. 사실 내 주장은 비극적 정서나 세계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격 묘사의 리얼리티가 더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장편처럼 주인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의 성격이 단순화되고 엇비슷해져 개체로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현상을 김애란은 극복할 수 있을까.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겠지만, 현재의 장편만을 보자면 당장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장터가 김애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이것이 꼭 김애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젊은 작가들에게 마치 장편 소설을 쓰지 않으면 작가로서는 뭔가 미달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오늘날 문단 일각의 경향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장편과 단편은 사실상 영화와 연극처럼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 양식의 특이성에 대한 고려 없이 단편적 정황을 장편으로 확대하는 유혹에 자주 노출된다. 김애란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만, 액자 구조 속의 또 다른 소설로 제시되고 있는 <두근두근 내 여름>에서의 소설적 밀도와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까지 이르는 내면 독백과 대화체로 교차 전개되는 서사 사이에는 매우 큰 질적 편차가 존재한다. 이 편차가 극복되지 않은 채 장편의 말미에 돌올하게 제시되고 있는 작중 인물 한아름의 소설은, 마치 앞선 서사의 불완전성을 은폐하기 위한 작가의 지적 배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나의 유추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근거에서 말하자면, 실제로 이러한 서사적 배치는 자못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두근두근 내 인생>이 탁월한 성취를 이뤘다고 고평할 만한 수준의 장편 소설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통해서 김애란의 단편 세계가 충분히 심화되고 확장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양적인 괄목상대를 버텨낸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단편에서 장편으로 넘어가면서 이만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작가가 또래 세대의 작가 가운데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김애란의 소설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러나 김애란의 소설은 여전히 엄마 아빠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족 소설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다. 이 희비극적 가족 콘서트의 세계를 극복하는 일이 김애란에게는 장편다운 장편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끝으로 사소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책의 한 가지 편집상의 의문에 대해 지적하고 글을 끝맺도록 하자. 이 소설의 '작가의 말' 다음에는 "본문에 인용되거나 언급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라는 진술 후에 몇 권의 책과 음악의 출처가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 속에서 소녀 적의 어머니와 방송국 피디가 된 승찬 아저씨의 관계에서 선물로 오간 서정윤의 <홀로서기>에 대한 출처 명기가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 속에서 <홀로서기>라는 시집은 엄마와 승찬 아저씨 뿐 아니라, 한아름과 승찬 아저씨의 만남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다른 출처는 소상히 밝혔으면서도 왜 <홀로서기>는 누락된 것일까. 1980년대의 대중적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을 누구나 다 알고 있어서 생략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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