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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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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말씀 (막 11:1-11)으로 설교 작성 : 전개식 설교
제목 : 공허한 외침으로 가득 찬 인생?
『로마인의 이야기』에는 로마 개선장군의 입성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개선식이 있기 전까지는 로마 시내에 들어올 수 없었고, 성 밖에서 수십 일 혹은 수개월을 머물면서 개선식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치르고는 했다. 개선식은 개선한 장군에게도 대단한 영광이었지만 로마의 시민들 전부가 열광하는 대 잔치가 되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흰 백마를 타고 개선장군이 호위대에 둘러싸여 로마의 신전으로 이어지는 가도를 따라 들어설 때 시민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으며, 그의 휘하의 군단 병력들이 들어오고 또 수많은 전리품들과 포로들이 들어올 때면 대 로마제국의 자존심과 영광을 바라보며 온 시민들은 열광했다. 오랜 전투에서 생명을 걸고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싸운 전사들이 승리를 쟁취하고, 그 승리의 영광을 로마 시민들과 로마의 신들에게 바치는 하나의 예전이었다. 그 승리의 전사들에게 맘껏 박수를 보내고 환호를 보내는 것은 로마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였다고 생각한다.
Move 1 : 초라한 입성식
그에 비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승리의 입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고 초라한 행렬이었다. 규모나 모습에서도 그렇고, 그 행렬에 참가한 사람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시골 중고등학교의 가장행렬 비슷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탄다는 것은 탄 사람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고, 나귀 새끼에게도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을 태우는 데에 적절하게 훈련되지 않은 어린 나귀였기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 벽에 몸을 부비기도 하고, 아마 뒷발질도 했을 것이다.
타고 가는 나귀 위에는 그럴싸한 안장도 없고 적절한 장식도 없었다. 물론 호위병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말 위에는 허름한 옷이 깔려 있을 뿐이었고,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길에는 카펫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개선장군이 행진하는 그 길에는 붉은 카펫이 깔리고 길 주변은 아름다운 꽃과 화분들, 그리고 여러 깃발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예수님의 행진은 그렇지 못했다. 초라하지만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던 열렬한 지지자들은 로마의 개선식을 연상하며 카펫 대신에 그들의 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나아가시는 길에 깔았을 것이다. 아마도 앞서고 뒤서면서 옷을 걷어 와서 앞에 깔고 또 깔았을 것이며, 아마도 예수님은 그 타이밍을 위해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군중들도 없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므로 개선식 치고는 너무 초라해서, 궁여지책으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옆에 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호성을 보낸다. 그리고 구약의 말씀이 생각나“호산나”를 외치고 있었다.
Move 2 : 초라하지만 영광의 행렬
인간적으로 볼 때는 너무 초라한 행렬이고, 차라리 숨기고 싶은 그런 왜소한 모습이었지만, 사복음서 기자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초라한 사건이 계속해서 읽혀지고, 기억되고, 다시 들려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두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오늘 같은 종려주일이면 세계의 온 교회가 읽게 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초라한 행렬을 재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생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등극하시는 승리의 입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시는 평화의 왕의 등극이었다. 전쟁의 영웅들로 세워 지는 일은 그 배후에 얼마나 잔인한 학살이 자행된 다음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전쟁의 영웅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말을 탔지만,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은 나귀를 타셨다. 그것도 겸손히 새끼 나귀를 타셨다.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그 순간은 하늘과 땅이 잇대어지는 영광의 순간이었다. 하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적으로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Move 3 : 놀라운 헌신
그 영광의 입성을 위해 한 무명의 헌신자가 있어야 했다. 이 부분에 와서 주님은 나귀 좀 잠시 빌리자고 부탁하거나 애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당하게 주권 (主權)을 선언하고 있다. “주인이 쓰시겠다 하라!”주님은 만유의 주인(the Lord of everything)이심을 당당하게 외치고 계신다.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왕권’이며, ‘주권’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귀 주인이 순순히 그 나귀를 내어놓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그가 주님을 알고 있었는지, 혹 주님을 모셔 들인 그리스도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지만, 그 무명인은 놀라운 응답을 드리고 있다. 주님의 선언 앞에 자신의 귀한 것을 드려 헌신한 사람으로 인해 주님은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된다.
“주인”혹은 주님이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큐리오스”라는 말로 고백했던 이 말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이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인생도, 나의 가진 것도, 나의 모든 것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이것이 성숙한 교회의 모습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영광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 앞에 무명의 나귀 주인은 자신의 것을 내놓는다. 그냥 빌려 드리는 자세가 아니라 온전히 나귀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그의 계획도 접고, 그의 욕심도 접고, 그것을 선뜻 내어놓고 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것을 잠시 빌려 쓰다 가는 인생임을 이 무명의 그리스도 인은 얼마나 자세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 두고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쓰다 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것처럼 움켜쥐고 살다가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가는 부자를 가리켜서 ‘어리석다’고 말씀하신다(눅12:13-21). 주인처럼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한 무명의 신앙인은 이 점에 있어서 얼마나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가?“ 주님 것이오니, 주님 원하시는 대로 쓰셔야지요. 주님이 먼저 쓰셔야지요.”
이것은 우리 삶 가운데서 날마다 고백되어야 할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한 가지는 주님의 요청에 대해서 거절했다면 주님은 다른 사람의 나귀를 탔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이 놀라운 축복의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는 수천 번이고 그렇게 하길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Move 4 : 건강한 신앙인인가?
여기에서 제기하게 되는 중요한 질문 한 가지는 종려주일, 예수님의 초라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이 건강한 신앙인들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21세기를 전후하여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건강한 교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관심이다. 교회가 건강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라게 되어 있다. 성장하기 위해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건강한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하 게 된다.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교회들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은 다음의 사실들을 늘 점검하고, 그 부분에 있어서 바로 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계속해서 말씀으로 훈련받고 있는가?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나타내고 있는가?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위해 진정으로 헌신된 사람들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날 환호하던 그 사람들’은 건강한 신앙인들이며 건강한 예배자들이었는가? 아마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건강한 성도들이 아니었다. 결코 건강한 예배자들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마음은 다른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린 나귀의 헌신은 주님이 안락하게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데에는 너무나 부족한 헌신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지만 주님은 기뻐 받으셨다.
나귀의 자기 드림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있을 때 가치가 있다. 그가 대신 박수를 받으려고 한다거나, 그가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나서는 순간 그의 존재 가치는 이미 떨어지고 만다. 그가 힘들다고 예수님을 내려 놓는다면 그 순간 그의 존재 가치는 없어지고 만다. 예수를 담고 있는 순간, 교회는 귀한 것이 된다.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빠지면 모든 것이 빠져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수님을 모신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이다. 건강한 예배자들, 건강한 헌신자들이 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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