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군대의 남침에 급박하게 부산으로 쫓겨온 대한민국 정부. 1950년 8월 15일 임시 막사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 모습이다. 진용을 재정비한 국무회의의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진다.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김종필 전 총리
박보균
편집인
전쟁의 리더십.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전쟁에서 지도자의 확고한 리더십은 언어의 관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61년 전 전쟁을 맞았던 대한민국 지도부는 그렇지 못했다. 그 반대였다. 육군본부 정보국 장교로서 김일성 군대가 전격 남침하면서 빚어진 1950년 6월 25~28일까지의 지도부 상황과 전황을 입체적으로, 가장 가까이 지켜본 김종필(JP) 전 총리. 본사 박보균 편집인이 JP와 전쟁의 리더십에 관해 대담했다.
-국가 위기 때 지도자의 말은 국민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고양시킵니다. 리더십의 언어는 대중에게 국난 극복의 용기를 주고, 재기의 상상력도 키워줍니다. 그런데 6·25 전후 정치 지도자, 국군 지휘부의 말은 허황되고 거짓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 말들이 국민을 분노, 좌절케 했으며 결국 리더십과 대중 사이의 신뢰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1949년 연말에 작성한 ‘종합 적정 판단서’의 경우도 그랬어. 우리가 적의 침공 시기와 공격로 등을 정확하게 예측한 보고서를 다 올렸어요.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에게 말예요. 그래도 그 사람들 말이지, 입만 벌리면 ‘일주일이면 우리가 평양 점령한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군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하고 다녔어요.”
-종합 적정 판단서처럼 위기를 예측한 보고가 전달이 안 된 이유가 있을 법합니다. 지휘부의 인적 구성에서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신성모 장관이 자리에 올라왔을 때 ‘우리가 참 별 장관 다 모신다’고 했어요. 당시에 우리 해군에 뭐가 있었어? 그런데도 신 장관은 대통령에게 ‘동해안과 서해안으로 언제든지 작전을 펼쳐 평양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거든. 국회와 정부 지도자 모두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지 못했어요. 허황함…, 그런 생각이 들었지.”
-민간 상선 선장 마도로스 출신인 신성모 국방장관, 병기장교 출신인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의 기용 등이 남침에 제대로 대처 못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니까 다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인사에서 실패한 거야.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국방 쪽에서 전쟁이나 군사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올라온 거지.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두고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고 하잖소. 그런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이유가 다 있었던 게지. 배 타던 선장 출신 신성모씨를 국방부 장관으로 기용하고, 50년 들어서는 북한의 남침설이 난무하는데도 작전 경험이 전혀 없던 채병덕 소장을 육군 총참모장에 앉힌 게 다 그래요.”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전차 T-34가 시가지를 행진하고 있다.
-전쟁 의지가 평화를 보장한다고 합니다. 6·25를 맞을 때 우리는 그런 의지가 있었습니까. 개전 초반의 상황에서 나타난 한국 지휘부의 행동에는 그런 단호한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그런 게 없었어요. 전쟁 터지기 하루 전인 24일 오후에도 다들 장교 구락부 파티에나 갈 생각에 빠져 있었지. 외부적인 요인도 있어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50년 1월에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했잖아. 북한이 이를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트루먼 대통령도 한국이 책임질 상대가 아니라는 식의 판단을 했어요. 미국의 그런 태도도 전쟁을 불러들인 셈이지….”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모습은 한국군 지도부에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대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만에 따른 오판, 오판에 따른 자기 최면에 빠져 있던 것 아닙니까.
“전쟁 직전과 직후에 그런 게 잘 드러났지요. 채병덕 총참모장은 전쟁이 터진 25일 오후 2시에 국무회의에 가서 ‘적의 전면공격이 아닌 것 같다. (50년 3월에 붙잡힌 간첩)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려는 책략’이라고 보고해요. 다음날 열린 군사원로회의에서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우리 군이 공격 중이니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발언하지. 두 사람이 군을 이끄는 최고 지휘부였는데, 채 총참모장은 서울을 버리고 떠날 때까지 각의나 국회에 가서 ‘3개 후방 사단이 올라오면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해 보이겠다’ ‘곧 북진할 테니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쳐요. 신성모 장관도 그런 소리를 계속 하고 다녔어요. 두 사람이 그런 허황한 소리를 하는데도 국회의원들은 박수갈채까지 보내고 있었으니, 다들 이상한 맹신(盲信)에 빠져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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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쟁 전후의 발언 내용들이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입력됐고, 결국 전쟁이 벌어지면서 참혹한 결과를 빚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을 속인 것이지. 호언장담(豪言壯談), 허황한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안했을지는 몰라도 아주 심각한 결과를 불렀어요. 김일성의 북한은 ‘곧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는 한국군 지도부의 발언을 핑계로 우리가 저들을 먼저 때렸다는 북침설(北侵說)을 만들었지. 미국이 한국군 지도부가 그런 발언을 하면 ‘한국군이 충분히 싸울 수 있는 모양이구나’라는 판단을 했을 거예요. 역시 다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마이너스 효과를 불렀던 거야. 그런 거 다 우리 스스로 만들고 퍼뜨렸어.”
-지도자의 발언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전쟁 전후에 그런 발언들이 속출했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넘어갔겠습니다.
“전쟁이 터지고나서도 국회는 ‘수도 서울 사수(死守) 결의’까지 해놓고서 도망쳤지요.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어요. 군 지휘부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해놓고서는 먼저 빠졌지. 시민들에게는 ‘혼란 일으키는 행동은 삼가라’ ‘인민군을 여기저기서 격퇴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때 서울 시민 심리는 정부와 군을 신뢰했다기보다는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해야 옳지. 시민들은 멍하니 있다가 지도부가 모두 서울을 떠난 6월 28일을 맞았던 거요.”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평화는 일순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비해 북한의 김일성은 치밀한 판단력, 강한 정치력으로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김일성이 능력을 갖췄던 것은 사실이에요. 소련이 그를 전폭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쥐어서 가능했던 거지요. 결단력과 정치력을 김일성이 갖췄던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김일성은 전쟁이 벌어지던 50년에만 10회에 걸쳐 무장공비 3400여 명을 남한에 침투시켰어. 먼저 점(點)을 차지해 선(線)으로 연결한 뒤 면(面)으로 확대한다는 생각이었지. 그만큼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했던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못했어요. 북한군이 쳐들어 올 리 없다는 미국 수뇌부의 판단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지. 우리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한 것도 전혀 없어.”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는 전쟁으로 바꿔야 합니다. 외국에서는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행진까지 합니다. 우리는 1990년까지 노병들의 6·25 거리 행진을 했다가 끊긴 뒤 지난해에야 다시 부활했습니다.
“그런 거 없애는 게 다 무식한 짓이야. 노태우 정부가 북방외교 한다면서 다 없앴어. 북한은 사건 일으켜 놓고 저들 원하는 대로 끌고 가지.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때 북한을 규탄하려면 철저히 했어야 해요. 엄청난 짓 일으킨 것에 우리가 그 책임을 철저하게 물었어야 하는 거예요. 북한이 전쟁할 배짱 없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우리는 지금 문이 10개라면 5개라도 꽉 쥐고 비밀을 관리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방에 구멍이 뚫려 있어요.”
(마지막으로 지도자들의 준비 없는 태도, 허황한 리더십 등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JP는 손가락으로 천장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는 글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사용한 말로, ‘말을 아끼고 내실을 꾀하라’는 권유를 담고 있다.)
정리=유광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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