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책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부록을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공개합니다.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가 없다고 우기는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부록 : 오늘날도 선지자와 사도가 존재하는가?
오늘날도 선지자가 존재할까요? 어떤 이들은 지금은 선지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선지자는 구약시대에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가정 하에서 예언사역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공격하고 폄론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합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마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을 보낼 것이며 너희가 구박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보낸다는 것입니까? 구약시대입니까? 아닙니다. 과거시제가 아니라 미래시제(“구박하리라.”)를 사용했으므로 분명히 신약시대입니다.
행 11: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이때는 구약시대가 아니라 분명히 신약시대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아가보는 훗날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라고 예언한 그 선지자입니다(행 21:11).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이처럼 안디옥 교회 한 교회 안에도 여러 명의 선지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교회의 중요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행 15:32-33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였다는 말은 그 당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런데 유다도 선지자고 실라도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이 두 선지자는 엉뚱한 예언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웠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라는 말에 단서가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의 권위 하에 있었으며 그 아래 거하며 순복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어디에 선지자를 세우셨다고요? 유대교가 아니라 “교회 중에” 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는 바로 교회시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선지자가 없다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고전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누가 자기를 선지자로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하여 착각한 것이다. 요즘 시대에 선지자가 어디 있냐?”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로 선지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그가 실제로 선지자라 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즉 지도자들의 권위와 지도 아래 있어야 함을 분명히 했습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이것이 구약시대의 유대교에 주어진 직분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신약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딛 1:12-13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예루살렘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또다시 여기 그레데인들 중에 있었던 무명의 선지자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당시 선지자들이 여러 지역에 두루 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계 11:3-10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미래인 7년대환난 때 일어날 일입니다. 두 증인은 그때 사역하게 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끝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에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한 10년 뒤에는 왕이 나타날까요? 아니요. 절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지나갔고 지금은 대통령이 통치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가 구약시대로 끝났다면 미래에 두 증인 즉 두 선지자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이것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언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이것이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증거가 됩니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가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참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이 없는데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참인 것처럼 가장하여 속일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니까 위폐가 있는 것이지, 돈이 없는데 어떻게 위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 선지자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명백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항상 선지자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선지자였고,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도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냈습니까? 제사장과 율법사들에게만 이스라엘 백성을 맡겨 놓았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것입니다. 다 망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들에게만 교회를 맡겨 놓으면 큰일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조차 회개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보다 못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꺼지지 않습니다. 식어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매시대마다 선지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장에서 나와 절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성경을 통해 충분히 증명한 것처럼, 지금도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수많은 선지자들이 존재합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존경하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비롯하여 밥 존스, 데이비드 윌커슨, 릭 조이너, 바비 코너, 신디 제이콥스, 마크 듀퐁, 샨 볼츠, 그래엄 쿡, 짐 골, 패트리샤 킹... 등 그 이름을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실제로 선지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국제적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수십 수백만의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요엘이 성경에서 교회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물론 이렇게 예언하는 모든 이들이 선지자는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이들 중 선지자로 만세 전에 선택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절대로 선지자가 없다는 무지한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종교적이 되어 선지자와 예언 사역을 공격하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선지자와 예언 사역을 수용하되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 하나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왜 예언이 100% 정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참 선지자들의 예언은 항상 100%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럴까요?
예언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주로 이런 답변을 내놓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성령님이 모든 믿는 자들의 속에 내주하시지도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예언마저도 틀리면 어떤 기준도 없는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선지자들을 붙잡아 주셨고 그들의 예언은 정확했다. 반면에 신약시대에는 성경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령님이 각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신약의 신자들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분별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과 달리 신약시대의 예언은 100% 정확하지는 않다.’ 저는 이 대답이 틀린 대답이 아니며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약의 예언도 100% 정확하면 더 좋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신약의 선지자들을 구약시대처럼 붙잡아주시지 않는 걸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제가 가진 의문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드디어 이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두 가지로 답을 얻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이 책을 쓰던 도중 주의 성령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해답의 실마리는 요엘의 예언에 있었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소수의 선지자들에게만 임했습니다. 그들은 만세 전에 선지자로 선택된 자들이었고, 그리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의탁하사”라는 말에 나타나듯이 거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음의 비밀을 나눌 만큼 성숙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꼭 이런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는 요엘이 예언한 것처럼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집니다. 물론 그 중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거룩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에 속하는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거룩하거나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꼭 하나님께서 제한하셔서 라기보다는 부득불 예언이 부정확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이와 같이 바울은 예언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언이 항상 정확하다면 분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이 다 정확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항상 100% 정확하지 않은 것은 성경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운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거룩해지면 됩니다. 그들처럼 주님과 친밀해지고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그러면 아가보 선지자처럼 신약시대에도 항상 정확한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의 답은,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책을 통해서 얻었습니다. 이 책은 사도, 선지자, 목사에 관한 성경의 관점을 소개한 책인데 목회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은사 사역자들에게 필독서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언은 방언처럼 언제나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왕하 3:11-16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있도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예언은 베드로가 말한 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조차 바로 예언하지 못하고 거문고를 탈 자를 불러와서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비로소 예언했습니다.
렘 42:1-7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이와 같이 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예레미야도 묻는 것에 대해 바로 예언하지 않고 기도하고 기다리다가 10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 예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언제나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 릭 조이너 목사님의 책을 번역한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릭 조이너 목사님을 만나서 기도 받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기대감을 가지고 릭 조이너에게 예언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릭 조이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예언은 내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오래 전부터 이렇게 가르쳐오셨습니다. 그리고 신간에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을 얹을 때마다 예언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소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예언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선지자 직임은 그 분이 뜻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영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믿는 자들은 심지어 성령의 촉구하심을 받지 않을지라도 예언할 수 있으며, 방언을 말할 수 있으며, 그리고 마음대로 통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모방하여 전적으로 육으로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언의 정확성을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만약 예언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주권적인 감동과 함께 계시가 주어질 때만 예언을 한다면 그 정확성이 놀랄 정도로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선지자들과 예언사역자들은 성령의 감동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사역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며 우리 교회의 예언사역에도 이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언사역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의 예언사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지침을 주었습니다.
첫째, 예언사역이 있는 날 영적 상태가 좋지 않고 성령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사역자는 자진해서 그날 예언사역을 하지 않는다.
둘째, 성령 충만하여 예언사역에 임한 사역자라도 의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언의 말씀을 나누어주지는 않는다. 예언이 주어지는 사람에게는 예언하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축복기도를 해주고 보낸다.
끝으로, 선지자에 대해서 꼭 드릴 말씀은 선지자는 단순히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쓴 글을 보십시오.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그 외 다른 예언서들을 보십시오. 그 중 상당수의 내용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에게 직접 하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신약의 교회들을 위해서 세우신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설교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이든 반드시 말씀에 정통해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독서를 많이 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일정 수준 이상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실력 있는 설교자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선지자도 보통은 계시적이고 영감에 넘치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사역하다가 성령의 감동이 임하고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에만 예언해야 합니다. 마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치유사역을 할 때 기름부음이 있을 때는 기름부음으로 사역하다가 기름부음이 떨어지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역하듯이, 선지자도 예언의 특별한 기름부음이 없을 때는 가르침으로 사역하고 예언의 기름 부으심이 임할 때에만 예언하며 사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육으로 사역하지 않고 정말 영으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예언과 계시를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효과적으로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지자는 오늘날도 존재합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떨까요? 사도 역시 지금까지도 존재할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처럼 사도에 대해서도 지금은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케네스 해긴, 피터 와그너, 빌 해몬, 데이빗 캐니스트러시,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등 많은 분들의 수고에 의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상태입니다. 그러면 새로워 보이는 이 주장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장 2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은 절대 사도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중 누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금은 사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도의 자격이 아니라 어린양 12사도의 자격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양의 12사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해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 21:13-14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이처럼 어린양 12사도는 특별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어린양의 12사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그는 여전히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모든 사도의 자격이라면 바울도 사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사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린양 12사도의 자격이지 모든 사도의 자격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12사도와 같은 사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사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와 선지자가 모두 성경의 완성을 위해 세움 받은 자는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중에도 성경을 단 한 권도 기록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도가 아닌데도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볼 때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의 사명이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세기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성도는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봉사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즉 사도의 역할이 아직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의 직분이 1세기에, 혹은 교회사의 중간에 끝날 수 있겠습니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주셨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이런 사역들은 지금은 없어져버렸어요. 오늘날 남아있는 사역들은 교사와 목사와 전도자뿐이에요. 오늘날 사도나 선지자는 없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과 세우는 일에 부르셨다고 했습니다(엡 4:11-12). 모든 성도가 이미 온전케 되었습니까?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사역이 있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 아직도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사역들과 섬기는 은사들은 지금도 역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도의 직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교회를 위해 사도들을 보내고 계시며 지금도 진정한 사도들이 존재합니다. 사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한편,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쯤 제가 춘천에서 목회하는 저의 동기 목사님의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지금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 시절 항상 1등을 도맡아했던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펴서 다음 부분을 읽어주었습니다.
엡 3:4-5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러면서 “이 구절에는 당시의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해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선지자는 그 당시만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과연 장학생답게 예리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지적에 대해서 올바른 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한 의문을 마음에 묻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힘써 연구한다고 항상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출판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서 비로소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1987년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교회 안에 친히 확립하신 사역의 은사들에 대해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는 네 가지의 등급 또는 서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서열이나 등급 안에서, 사도들은 서로 다른 분량의 기름 부으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의 첫 번째 서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도뿐 아니라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요 3:34). 예수님이 가지셨던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은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어린양의 사도들입니다. 즉 맛디아를 포함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인데 사도 바울도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비토대적인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사도들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중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대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바로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등급입니다. 이 서열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그들도 역시 신약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1987년 방문에서 예수님은 또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대적인 사도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이 등급 또는 수준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신약성경의 교리적 토대를 놓기 위해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와 선지자들은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복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인 이 세 번째 서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령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엡 3:4-5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바울은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여진 토대 위에 쌓아올리기만 합니다.
엡 2:19-20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은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토대 위에 쌓여져가야 합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아무도 오늘날 복음의 기초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바울은, 이미 놓여진 기초 위에 우리가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고전 3:10). 우리는 그것에 뭔가를 더할 수도 뭔가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방문에서 예수님은 저에게 매우 재미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오늘날에는 기초를 놓는 사도들도 없고, 기초를 놓는 선지자들도 없단다. 오늘날에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 또는 권위와 같은 서열, 또는 같은 정도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아무도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에 속해 있지 않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 글은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에베소서 3장 4-5절에 관한 저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래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해긴 목사님의 말대로, 오늘날 토대적인 사도들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들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관해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 등급의 사도와 선지자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보다는 더 낮은 서열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입니다...
고대 헬라어에서 ‘사도’라는 말은 명사로서 위임받은 사자, 또는 대사를 의미했습니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은 사도라고 불리워졌는데, 왜냐하면 그는 어떤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특별히 보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을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네 번째 서열에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주어서 교회에 보내시는데, 어떤 성경적인 계보를 따라 믿는 자들을 분발시키려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은 단지 그 일을 행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을 특별히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에 어떤 메시지나 사역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스미스 위글스워스를 ‘믿음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보냄 받은 자’로 부르신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에 단지 한 가지 특별한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도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 교회 때에는 토대적인 사도와 비토대적인 사도, 두 종류의 사도가 존재했습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사도였고, 바나바는 비토대적인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토대적인 사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토대적인 사도들뿐입니다. 또 토대적인 사도들 중에도 바울이나 어린양 12사도 중 베드로나 요한처럼 말씀이 강한 사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도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이처럼 토대적인 사도는 아니지만 성경의 진리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대로 분별하고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허물어진 교회의 토대를 다시 원래대로 보수하는 그런 사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존 웨슬리와 찰스 피니가 그런 분이고, 케네스 해긴이나 릭 조이너 역시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 일에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책 “다림줄”에 소개한 신학생 시절 어느 여전도사님이 기도원에서 함께 기도하다가 말씀의 은사에 대해 받은 응답이나 제 친구 샨 볼츠가 영동제일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때 도왔던 고위층 천사를 보고 제게 예언한 것도 바로 그런 기름부음을 뜻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즉 성경 이외에 무슨 계시를 받아 토대를 새로 세우거나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이단입니다.) 이미 토대적인 사도들을 통해 완성된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교하므로 그 토대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기름부음이라고 이해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과 2장 6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전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바울이 본인만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인데 1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린양의 12사도 혹은 바울과 바나바에서 사도의 계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과 바나바 다음 세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실라와 디모데 뒤에는 사도가 끝났을까요? 아니요.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증거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사도도 오늘날 존재합니다.
그럼 사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사도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상태이지만 사도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사도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선 아직 충분하게 규명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도수가 700명 이상 되면 그 목사는 틀림없이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아닌 복음전도자 혹은 목사나 교사라도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분들은 능히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빌립이 그 한 예입니다. 빌립은 분명 사도가 아니라 복음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얼마나 큰 무리를 주께로 이끌었습니까? 또, 우리나라에 강해설교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 중에도 1,000명이 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다 사도일까요? 과연 그분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이 피터 와그너 박사가 말하는 ‘신사도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교회도 없잖아 있겠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사도성을 교회를 세우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누가 자기를 사도라고 주장하면 교회를 몇 개 세웠는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사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도의 표라 불리워지는 표적과 기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대로 그것은 사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들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가 어떤 사람을 사도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사도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표적과 기사라면 복음전도자가 더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예수님과 12제자 그리고 바울의 사역 속에 나타난 놀라운 표적과 기적이 꼭 사도라서 라기 보다는 그분들이 강력한 복음전도자의 기름부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실제로 복음전도를 하는 현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이유 때문에 70인 제자들이 사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귀신 쫓고 병 고치는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 것 아니겠습니까?
막 16:15-18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이 말씀과 전도자 빌립의 사역에 잘 나타나듯이 표적과 기적은 사도의 사역보다 복음전도자의 사역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가 다 강력한 표적과 기사의 사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쩌면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었던 야고보 같은 사도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강력한 표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나 다른 사도들보다 오히려 전도자 빌립이 더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을 사도로 특징지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도성은 무엇일까요? 요즘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에 대한 이해가 제게 점차 증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가 무엇이냐? 하면, 사도는 지혜로운 건축자입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바울은 사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엡 2:20). 즉 사도란 터를 닦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른 이” 고린도전서 3장이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들에 대한 장임을 감안할 때, 다른 사역자들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도는 지혜로운 건축자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혼자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기술자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건물을 지어갑니다. 마치 사도가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와 힘을 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엡 4:11-12)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미장이나 다른 건축 기술자들과 다른 것은 건물 전체에 대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건물에 대한 청사진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술자들에게 일을 맡기고 감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의 주요 역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도성입니다. 진정으로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이런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관한, 교회에 관한, 사역에 관한 성경적이고 영감이 넘치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이렇게 세워야 한다, 사역은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실질적인 분별과 지도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성경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예루살렘 회의’와 ‘바울서신’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사도들이 장로와 함께 모여서 예수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가르쳐야 하는지 교리와 규범을 정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란 교리와 사역자와 교회에 대한 재판을 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이런 일들을 학자나 이단 사냥꾼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고 사도들이 할 일입니다. 그래야 바른 교리를 갖게 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했던 재판처럼 불의한 재판이 아니라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짐으로 교회 안에 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교단을 보더라도 왜곡되지 않고 성경적으로 바른 교리는 갖고 있는 것은 존 웨슬리에 의해 세워진 감리교나 에이미 샘플 멕퍼슨에 의해 세워진 퀘이커교처럼 학자풍의 지도자가 아니라 강력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단이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어떤 사도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도들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가 보여주는 실제입니다.
바울서신은 사도에 대한 더 분명한 개념과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할 때 성령께서 제 영에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울서신의 첫 머리에 보면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엡 1:1)이라고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에 저는 이것이 단지 발신자를 밝히는 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게 말씀했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사말이 아니라 바울이 사도로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쓰고 있으며, 현재 사도 사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는 사도가 무엇이지를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바울서신들을 주의해서 보거라. 그러면 사도가 무엇인지, 사도의 책무가 무엇이며, 사도사역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바울서신을 예의주시함으로써 사도가 무엇인지, 사도의 책무가 무엇이며 사도 사역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각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어떤 것이 바른 교리인지, 올바른 교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에 나오는 칭의, 성화, 영화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또,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라고 출교시켜야 할 자를 출교시키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심지어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각 교회에 편지를 써서 칭찬과 책망과 위로와 권면을 하며 그 교회의 현안과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편지를 써서 멘토링을 합니다. 제가 생각나는 대로 임의로 몇 가지를 지목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갑자기 사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밀물처럼 밀려오지 않습니까? 사도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단순히 직책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영적 지혜로 분별력 그리고 성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저는 이것이 모든 사도의 특징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와는 다른 종류의 사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특징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합니다. 주님은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워서 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교회는 균형을 잃어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주로 목사와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제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짓 사도, 혹은 자칭 사도가 아닌 그리고 진정한 사도라도 일반적인 사도가 아니라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게 될 것이며 미래가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성령의 늦은 비가 강력하게 내려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진정한 사도들이 일어나고 특히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일어나도록 잊지 말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문제를 잠깐 언급하는 것이 지혜일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도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이냐? 에 대해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도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목사라고 하는 것이 교만도 아니고 당연한 것이듯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에선 임직식을 통해 사도와 선지자를 남발하고 이름뿐인 사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칭 사도 즉 거짓 사도들도 많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열방의 사도’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아는데 그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거짓된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사역은 어떤 직분으로 불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어떠한 능력을 주셨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떤 직함으로 부르며 돌아다니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능력 즉 실제적인 사역과 기름부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칭에 연연하지 말고 실제적이 되어야 합니다. 해긴 목사님은 스스로를 사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당신은 교회를 몇 개나 세우셨습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도는 교회를 세우는 능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면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도 중의 한 분은 모잠비크에서 짧은 시간 내에 8,000여 교회를 세운 하이디 베이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이디 베이커는 “사랑이 강권하시도다”라는 제목이 새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모잠비크에 계신 우리 목사님들은 좋은 옷이나 가죽 구두가 없습니다. 그들은 흙집에 삽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도’나 ‘목사’라 부르는 대신 ‘파파’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 놓은’(행 17:6) 초대교회 사도들과 비슷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믿음의 영웅 가운데 한 분은 마마 다누에카입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셋이나 살렸고 파파 다누에카와 함께 한 지역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곳마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따라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감투나 자리가 아닙니다. 사도는 실제적인 기능입니다. 능력과 기름 부음과 사역입니다. 자신을 사도라고 떠벌리지만 사실은 사도가 아닐 수도 있고 자신을 가리켜 한 번도 사도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가 강력한 사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명칭에 연연하지 말고 실제적인 사도의 기름부음을 사모하는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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