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블랙홀' 아이폰4, 만능 배터리 하나쯤 있어야
'배터리 먹는 블랙홀' 아이폰4, 만능 배터리는 필수...
'배터리 먹는 블랙홀' 아이폰4, 만능 배터리는 필수...

2010-09-13 09:57

아이폰4 개통행렬이 이어지면서 '귀하신 몸'이 된 상품들이 있다. 액정 보호필름, 케이스 등이 먼저다. 그리고 보조배터리가 덩달아 특수를 누리고 있다. 아이폰을 쓸 때 배터리 탓에 곤혹스러운 게 그 이유다. 단순 통화만 한다면 배터리 용량이 부족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음악이나 동영상을 감상하고 여기에 GPS나 무선랜, 게임 등 갖가지 애플리케이션을 몽땅 돌리면 아이폰은 배터리 먹는 하마가 된다. 그런데도 아이폰은 배터리 내장 방식(1,418mAh)인 탓에 여분을 갈아 끼울 수 없다.
맘편히 아이폰을 쓰고 싶다면 보조 배터리 하나쯤 장만하는 게 좋다. 아이폰용 보조배터리는 여러가지 형태가 시중에 나와있다. 이 가운데 전압 5V급 휴대기기에는 모두 사용 쓸 수 있는 대용량 보조배터리가 두루 쓸모있다.
 


'루카스'는 대용량 보조배터리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는 제품. 아이폰을 4번 충전시켜주는 넉넉한 용량이다. 5200mAh의 고용량임에도 128g(그램)으로 가볍다. 아이폰 및 각종 휴대폰, PMP, MP3, 휴대용 게임기 등 전압 5V급 포터블 기기에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써본 결과 동급 제품들 가운데 가장 늦게 출시됐지만 기능이 가장 우수하다. 최근 KT에서 아이폰4용으로 대량 구매했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 고효율 IC와 화재방지 퓨즈, 출력전원 공급 필터, 정전기 방지 등 안전기능이 많다. 비상용 플래시 라이트도 달려있다. 상품가격은 6만3천원. 지디몰(www.zdmall.co.kr)에서 온라인 최저가로 구매할 수 있다.
김우영 기자 kwy@heraldm.com


'배터리 먹는 블랙홀' 아이폰4, 만능 배터리는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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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사람 2010. 9. 19. 15:26

휴대폰 구입시 개통일을 확인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고폰을 피해가기 위해서예요

만약 구입 당시보다 전에 핸드폰이 개통 되었다면 누군가 사용했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휴대폰 판매점에서 실적을 늘리기 위해 가개통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요

 일단 휴대폰은 개통 됬다는 시점에서 중고이기 때문에 꼭 개통일 확인을 하고 구입해야 해요

그리고 일단 개통이 됬다는건 누군가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잖아요?

 구입자 입장에서도 나중에 알게 되면 찝찝한게 사실이구요..

뒤늦에 알게 되서 보상을 요구하게 되도 보상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해요..

그래서 구입하기 전엔 꼭 휴대폰 개통일을 확인하고 구입하셔야 합니다

 앞으로는 핸드폰 구입할때 구입하고자 하는 기종의 개통일 확인법을 숙지해서 가세요~

그래야 부당한 불이익은 당하지 않죠


삼성전자의 애니콜 단말기는 '메뉴' 버튼을 누른 뒤 '0'을 길게 누르면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창이 나오는데요

이 창에 패스워드 '6725'(또는0821,9820)를 입력하면 '개통일'이라는 메뉴가 나오고

이 메뉴에서 자신의 전화가 처음 개통된 날짜를 확인할 수 있어요


LG전자의 싸이언 단말기는 '메뉴' 버튼과 '0'을 누르면 나타나는 화면에

'147359*' '852456*' '000000*' 등 3개의 패스워드 중 하나를 입력하면 돼요


KTF에버 단말기는 '메뉴', '8', '0'을 순서대로 누르면

'서비스 코드를 입력하라(Enter Service Code)'는 화면이 나오고

여기에 패스워드 '292310'을 입력한 뒤 '시스템정보' 메뉴를 누르면 확인 가능해요


모토로라 레이저 폰은 *#카메라버튼 3번 누르면 최초등록시간이 나오는데요

만일 개통일이 자신이 휴대전화를 구입한 날보다 이르게 나오면 그 전화는

이미 누군가의 명의로 개통된 적이 있다는 의미지요

휴대전화 모델에 따라 위 방식으로 개통일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요


스카이 단말기는 #7583538324#8378# -->테스트 메뉴로 들어가세요

외우기 쉽게 #skteletech#test# 알파벳에 해당하는 숫자 한번씩 눌러주면 되요

2번 메뉴 보시면 Opening day 가 있는데요

11번 보면 폰 개패 횟수도 확인할 수 있어요~


팬택 & 큐리텔 단말기는 ##27732726 → 종료 → Version View. #(잠금) → 해제 →

대기화면 잠금 #1202


추가 : 햅틱2 개통일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다이얼키로 4433366368791 을 차례대로 누르면 시스템정보로 이동합니다

이곳에서 개통일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통일을 터치하면 언제 개통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고 하네요

by 아름다운 사람 2010. 9. 9. 22:48

휴대폰을 구매할 때는, 꼭 직접 보는 앞에서 제품을 개봉해달라고 해야합니다. 지금은 물건이 없고 창고에 있다고, 혹은 옆집에서 가져온다고 할 때는 한번쯤 유심히 살펴보세요. 직원이 DP되어 있던 휴대폰을 살며시 들고 가지는 않았는지, 박스가 뜯어져있지는 않았는지 지켜봐야합니다.

박스가 개봉되지 않은 새 휴대폰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것저것 잘 살펴봐야합니다. 휴대폰 대리점 직원들은 한번 뜯은 박스도 새 것처럼 만드는 기술들이 있기 때문이죠. 액정 보호 필름이 떨어져있지는 않은지, 휴대폰에 기스가 나있지는 않은지 확인하세요.

간혹 정말 새로 출고된 휴대폰일지라도 제조 과정의 실수로 엉뚱한 부속품들이 들어있거나, 휴대폰에 이상이 있거나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찝찝한 기분이 들지 않으려면 개통하기 전에 꼭 확인하세요.

어차피 기스나고 더러워질 휴대폰, 새폰인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좀 더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래된 재고의 경우에 휴대폰 상태에 따라 추가 할인을 해주기도 하거든요.

가끔 시리얼 넘버가 몇번대인지까지 확인하시는 분들도 있죠. 그런 일이 많지는 않지만, 가끔 생산일자에 따라 버그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왕이면 최근 시리얼 넘버를 찾아 구매하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2. 개통 이력 없는지 확인하기

휴대폰을 샀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들이 들어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휴대폰은 다른 제품들에 비해 취소가 확실합니다. 보통 개통 후 보름 이내에는 군말없이 취소를 해줍니다. 문제는 이 취소된 휴대폰을 다시 구입하는 고객들이죠.

취소된 휴대폰을 다시 파는 것에 대해 하도 클레임이 심해, 작년부터인가 취소된 휴대폰을 판매할 때에는 반드시 그 내용을 고객에게 고지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추가 할인도 가능하지요. 1번에 계시던 유형의 분들, 어차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런 유형의 추가 할인도 활용하시면 좋을 듯 하네요.

하지만 취소된 휴대폰을 다시 살 때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요. 아무 이상 없이 그냥 쓴다면 모르겠지만, 혹시나 휴대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경우 대리점에 가면 그냥 교체를 받을 수가 있는데요. 이 교체라는게 최초 개통 날짜 기준이거든요. 이 날짜를 지나게 되면, 새폰으로 교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AS를 받아야하는 불편과 찝찝함이 생기죠.

그러니 이런저런 것들 잘 고려해서 결정해야할 것 같네요.


3. 의무약정 보조금 확인하기

의무약정 보조금은 개통할 때는 혜택이지만, 나중에 휴대폰을 바꾸려 할 때는 족쇄가 되버립니다. 요즘은 공짜폰이 많으니, 그냥 공짜로 개통을 하고 말겠지만 이때 꼭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의무약정 보조금이 얼마가 들어있는지입니다.

의무약정 보조금은 보통 통신사별로 10만원 내외에서 머물고 있는데요. 여기에 추가적인 보조금을 더 실을 수가 있습니다. 별도 보조금은 최대 약 8만원 정도를 추가할 수가 있지요.

똑같은 휴대폰을 똑같이 공짜로 사더라도, 누구는 약정금액 10만원, 누구는 18만원에 살 수가 있는거지요. 얼마전 제 친구가 산지 얼마 안된 휴대폰을 물에 빠뜨렸는데요. 번호이동을 해서 새로 사려고 했더니, 보조금이 18만원으로 되어있더군요. 그 대리점에 붙어있는 의무약정 보조금 표에는 분명 최대가 12만원인데 말이죠.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거금을 들여 A/S를 받았다는 슬픈 얘기입니다.

그러니 휴대폰 구매할 때는 의무약정 보조금이 얼마가 포함되어 있는것인지 꼭 확인하세요.


4. 할인혜택 확인하기

요즘에는 좀 오래되고 사양이 딸리는 휴대폰들은 그냥 공짜에 살 수 있지만, 좀 괜찮은 녀석들은 요금+단말할인을 이용해야 좀 더 싸게 살 수 있습니다. SKT에는 T더블, KT에는 쇼킹스폰서, LGT에는 더블보너스가 있죠. 이런 녀석들은 요금제를 얼마짜리 이상 써야 일정액을 할인해주는 시스템입니다.

요금을 원래 그정도 쓰던 사람이 그 상품을 선택했다면 별 탈 없이 잘 쓸 수 있겠지만, 원래는 더 적은 요금을 내던 사람이 단말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상품을 선택할 수도 있죠.

이럴 경우에는 그 요금제를 쓰면 추가 요금 없이 몇분의 통화가 가능한지를 꼭 확인해야겠지요. 통화는 예전처럼 하면서 요금제만 비싼걸 쓴다면, 차라리 할부로 휴대폰을 구매한것보다 못하게 되는 셈이죠. 그러니 이왕 비싼 요금제로 가입을 했다면, 주어진 무료통화만큼 꾹꾹 눌러서 다 써버려야합니다.


5. 가입계약서 꼼꼼히 확인하기

휴대폰 개통할 때 가입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싸인만 하시는 분들 계시죠?(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가입계약서의 내용은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봐야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리점에서 개통을 하다가 실수로 내 계약 내용을 엉뚱하게 등록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가입비를 다 내고 왔는데, 가입비가 안낸 것으로 되어있다던가, 내가 동의하지도 않은 부가서비스가 들어있다던가 하는 경우가 제일 많죠.

가입계약서에 싸인을 할 때는 대리점 직원과 내가 얘기한 내용들이 정확히 들어있는지, 내가 모르는 다른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꼭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혹시나 나중에 내가 모르는 다른 것들이 등록되어 있거나, 누락되어 있을 때 그 계약서를 근거로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 TV보다도 비싼 요즘 휴대폰, 한번 살 때 확실히 확인해서, 나중에 속쓰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구요^_^
by 아름다운 사람 2010. 9. 9. 22:40


올 1분기 우리나라 월평균 가구당 통신비 지출액은 13만4178원으로 전체 소비지출의 5.8%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점점 얇아지는 지갑에 부담이 되는 통신요금 지출. 휴대폰 요금 절약하기 노하우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자신의 전화사용패턴에 맞는 요금제 사용하기

각 통신사별로 수많은 요금제가 제공되고 있지만 어떤 요금제가 나에게 맞는 요금제인지 선택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휴대폰을 쓰는 스타일에 맞춰 요금제를 선택하면 기본요금, 전화요금, 문자서비스요금 등으로 통신 지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표준요금제를 이용하는 것보다 자신의 전화사용패턴에 따라 요금제를 선택하는 것이 이익이다.

그렇다면 모든 이동 통신사의 400개가 넘는 요금제 중에 나에게 맞는 요금제는 무엇일까?

이런 이용자들을 위해 정보통신부가 직접 운영하는 '이동전화 최적 요금제 조회 사이트(http://010.ktoa.or.kr/)'를 이용해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요금제를 찾아 통신비 지출을 줄여보자.

SKT, KTF, LGT 의 이동통신사들은 개인의 통화 패턴에 맞춰 여러 가지 요금제를 선보이고 있다. 이 중 자신에게  맞는 통화요금제는 어떻게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날까? 주요 통화시간대, 총 통화시간, 문자메세지 이용량, 각종 부가서비스의 사용 여부 등 자신의 통화 습관을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다. 각 이동통신사 홈페이지에서는 내 최근통화패턴분석 결과를 제공하니 내가 사용하고 있는 통신사의 홈페이지에 방문하여 확인해보자. 이 통계를 http://010.ktoa.or.kr에 입력하면 자신의 통화 패턴에 맞는 가장 싼 요금제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이 사용하는 이동통신사 상품뿐 아니라 타 이동통신사의 요금 조회와 얼마를 아낄 수 있는지도 친절하게 표시해준다.

부부 또는 애인과의 통화량이 많다면 커플요금제를
문자사용이 많은 학생이라면 무제한 문자 요금제를
특정 몇 명과의 통화가 많은 사람이라면 지정번호 할인 요금제를
특정 장소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면 지역할인 요금제를 사용하는 것이 통신비 지출을 줄이는데 유리하다.



2. 무료 문자 사이트를 적극 활용하기

문자 한통에 20원. 하루에 문자 10통씩만 절약해도 한달이면 300통, 6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
무료 문자 사이트를 이용하여 문자 요금을 절약해보자.

무료 문자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사이트

Nate On(http://nateonweb.nate.com/) : SKT 인증회원 100건 / 그 외 회원 월 50건 제공
각 통신사 홈페이지 : 최대 월 100건 까지 제공
SKT(http://tworld.co.kr)
KTF(http://ktfmembers.com)
LGT(http://www.lgtelecom.com/)
파란(http://paran.com) : 메일 사용량에 따라 매월 50~300건 제공



3. 자동이체, 이메일 청구서로 할인혜택 받기

요즘 각 이동통신사들은 우편청구서 발송 비용 절감을 위해 고객들이 요금청구서를 우편이 아닌 인터넷이랑 휴대폰으로 받으면 요금 할인혜택은 물론 무료문자 또는 멤버쉽 포인트 적립 등의 혜택을 추가로 제공해 준다. 이를 잘 활용하는 것도 요금 절약의 방법. SK텔레콤은 청구 금액에서 200원 할인 혜택을 주고, KTF는 마일리지 200점과 인터넷 무료 문자 메시지 50건, LG텔레콤은 인터넷 무료 문자 메시지 10건을 제공한다. 할인 혜택 뿐만 아니라 온실가스 발생을 줄여 환경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우편 청구서로 발생하는 종이폐기물을 줄여 하나뿐인 지구를 지킬 수 있다.

또한 통신요금을 자동이체로 납부하면 보통 1%의 요금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1%를 우습게 보지 말자! 1%씩도 계속 모이면 큰 돈 된다. 절약은 10원부터 아껴나가는 것부터가 시작임을 잊지말자. 신용카드로 자동결제를 하는 경우에는 추가할인 혜택이 있는 곳도 있다.



4. 신용카드, 체크카드로 통신요금 할인 받자

각 신용카드사에서 발급하는 카드의 할인혜택을 살펴보면 휴대폰 요금을 할인해주거나 무료통화 시간을 제공해주는 서비스가 하나씩은 있다.

현대카드H는 휴대전화 요금 자동이체시 전월 카드 사용액에 따라 5~10%(월 2만원 한도)를 할인해 준다. 뿐만아니라 롯데 DC카드, BC티앤티(TNT)카드, 신한 A1카드 등도 카드 사용액에 따라 5~10%를 할인해 주며 삼성 블루아멕스 카드는 휴대전화 요금의 1%를 현금 형태로 돌려준다. 무료 통화 혜택을 주는 카드도 있는데 KB잇폰(it Phone)카드는 카드 발급시 휴대전화 무료통화 30분을 주며, 전달 카드 사용액에 따라 매달 30~60분의 무료통화를 추가로 준다. BC쇼(Show)킹세이브카드는 신용카드•휴대전화(KTF) 사용실적에 따라 매월 휴대전화 요금의 5~35%를 현금으로 돌려주고, SKT-현대카드M은 SK텔레콤 휴대전화 구입시 약정 조건에 따라 최대 28만8000원을 할인해 준다니 신용카드만 잘써도 통신요금 절약하는 재미를 톡톡히 볼 수 있다.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도 통신 요금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자되세요~

by 아름다운 사람 2010. 9. 9. 22:38
"갤럭시S 낙하실험 결과 눈길"
아이폰4와 갤럭시S의 견고함을 비교하기 위한 국내 한 업체의 낙하실험 결과가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국내 가격비교 사이트인 다나와는 갤럭시S를 1m 높이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뜨리는 실험 동영상을 9일 공개했다. 실험 결과 갤럭시S는 4차례 낙하 후 버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지상파 DMB 등의 기능이 구동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이어 1.6m 높이에서 떨어뜨렸을 때는 강화유리로 된 갤럭시S의 액정이 파손됐다. 다만, 다른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최근 미국의 한 애플 제품 수리업체가 벌인 아이폰4의 낙하실험에서는 1m 높이 에서 세 번째 떨어뜨렸을 때 액정이 깨진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다나와 관계자는 "갤럭시S가 앞면과 뒷면이 모두 강화유리로 된 아이폰4 보다는 충격에 강하다"면서도 "갤럭시S도 강화유리를 사용한 만큼, 절대적인 척도에서 튼튼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부분만을 구매동기로 삼는 것은 고민해봐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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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사람 2010. 7. 10. 00:22

종려주일, 고난주간 묵상자료(월-토)
종려주일, 고난주간 묵상자료(월-토)
종려주일, 고난주간 묵상자료(월-토)


승리의 입성 (종려주일)

찬 송

416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성 경

① 마태복음 21:1-11 ② 마가복음 11:1-11 ③ 누가복음 19:28-40

말씀묵상

부활절 전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로 예수님께서 죽음의 십자가가 기다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성에서 올라가신 날입니다.

이때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올라가시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줄줄 알고 " 호산나 다윗의 왕이여"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하신 모습으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죽음의 행진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 앞에 겸손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나의 작은 겸손과 희생으로 주님을 높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채 이기적으로 살아오시지는 않았습니까?

군중들의 외침 가운데 나귀새끼 타시고 침묵하신 채 예루살렘 성문에 들어서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그 눈빛을 바라보십시오.

기도제목

1)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2) 정의를 위해 담대한 성도 되게 해 주소서

실천사항

1)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계획표 다시 짜기

성전을 깨끗게 하심 [월요일]

찬 송

141장[웬말인가 날 위하여],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 247장[이 세상 풍파 심하고]

성 경

① 마태복음 21:18-22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② 마태복음 21:12-17 ③ 마가복음 11:15-17 ④ 누가복음 19:45-460

말씀묵상

승리의 예루살렘입성을 하신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하루를 지내셨습니다.

이른 아침 성으로 다시 들어오실 때 시장 끼를 느끼신 주님은 옆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나무를 보신 예수님은 이 나무를 저주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면서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에게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찾아 나와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을 높이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기도처럼 힘든 것이 또 있을까요? 그러기에 나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 하는 기도는 희생이며 헌신입니다. 교회를 통해 주시는 은혜는 돈으로 사지 못합니다. 나를 낮추는 기도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제목

1) 한 주간 동안의 새벽기도회를 위해 2) 고난주간기간 경건한 생활을 위해

실천사항

1)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2) 교통비와 꼭 필요한 돈 이외에는 갖고 나가지 않기

3) 마음으로 짓는 죄를 극복하기

변론하신 날 [화요일]

찬 송

147장[주 달려 죽은 십자가], 365장[내 주의 지신 십자가]

성 경

① 마태복음 22:15-22 세금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

② 마태복음 22:23-33 부화에 대한 사두개인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

③ 마태복음 22:34-40 계명에 대한 율법사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

말씀묵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당원들은 교리적인 차이로 인해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해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멀리 지내던 감정을 버리고 힘을 모아 예수님께 질문 공세를 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선한 일 조차 남과 같이 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악을 위해서는 서로가 힘을 합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선을 이루는데 함께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나만을 내세우기 위한 선행은 교만이며 위선입니다. 또한 성도는 죄악을 이기기 위해서도 서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누가 시험에 빠졌을 때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여 시험을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저들을 입을 다시 열지 못할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웃으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여기에 대답할 말씀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 대답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대적으로부터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으셨습니까?

기도제목

1) 개혁이 잘 이루어지는 우리 나라가 되기 위해 2) 환자를 위해

실천사항

1) 그 동안 불편한 관계로 지낸 이웃과 화해하기

2) 믿지 않는 이웃에게 성경을 선물하기

3) 텔레비젼 시청과 오락을 삼가고 가족과 대화하기

예수님께서 쉬신날 [수요일]

찬 송

84장[나 어느날 꿈속으 헤매며], 87장[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성 경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마태복음 26:1-5, 마가복음 14:1-5, 누가복음 22:1-2, 요한복음 11:47-53) 유다의 반역 (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 누가복음 22:3-6, 요한복음 13:1-2) 유월절의 준비(마태복음 26:17-20, 마가복음 14:12-17, 누가복음 22:7-14)

말씀묵상

화요일에 많은 사람들과 변론을 하신 주님은 피곤하셨습니다. 오늘은 쉬시는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쉬시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쉬지도 않고 예수님을 체포할 흉계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제자인 가롯유다까지 합세하여서 말입니다.

악은 이렇게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밤도 없이 열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안고 사는 우리는 어느 정도의 열심이 있습니까? 악의 세력보다 더 열심이 없다면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의 신앙을 되돌아 볼 시간조차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쁜 시간이 거의 육신을 위한 것이지 영혼을 위한 분주함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제 조용하게 하나님과 단 둘이서 만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거기서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조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도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릴 계획을 밤새워가며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제목

1) 교역자님을 위하여

실천사항

1) 오늘 중 한번 남에게 양보하기

2) 공해유발 생활용품 사용억제하기(샴푸, 세제, 스프레이, 일회용품 등)

3) 믿다가 낙심한 가족이나 이웃에게 교회 출석 권면 하기

발을 씻기시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심 [목요일]

찬 송

138장[만왕의 왕 내 주께서], 278장[사랑하는 주님 앞에]

성 경

① 최후의 만찬 (마태복음 26:26-29, 마가복음 14:22-25, 누가복음 22:15-20)

② 섬기는 제자가 될 것 (누가복음 22:24-30)

③ 사랑의 새계명 (요한복음 13:31-35)

말씀묵상

죽음을 앞둔 하루 전날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하루 앞둔 사람은 떨림과 괴로움에 잡혀 안절부절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으로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은 발의 때를 씻듯이 우리 영혼의 죄를 씻기 위함이였습니다. 거룩한 곳이기에 모세에게 발의 신을 벗으라고 하신 하나님은 거룩하고 영원한 곳인 천국에 서기 위하여서는 죄악을 씻고 벗어야 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아니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주님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조차도 주님의 피의 은혜를 잊어 버린지 오래되어서 그 감격을 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주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에 잠겨봅시다.

기도제목

1) 믿지 않는 가족, 친구, 이웃을 위해 2) 선교사님들을 위해 3)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교회와 동포를 위해

실천사항

1)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고 한사람에게 도움을 줍시다.

2)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날

3) 나의 작은 무관심으로 남이 크게 고통 당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적어보고 반성합시다.

돌아가신날 [금요일]

찬 송

141장[웬말인가 날 위하여], 211장[그 참혹한 십자가에]

성 경

① 마태복음 26:36-46 겟세마네의 기도

② 마태복음 26:47-56 잡히신 예수님

③ 마태복음 26:69-75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④ 마가복음 15:10-32 십자가에 달리심

⑤ 마태복음 27:57-61 무덤에 묻히심

말씀묵상

드디어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지시고 세상이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자기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까지의 배반은 더욱 큰 실패로 보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강해 보이고 교회는 약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인정도 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화려하고 강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흙에 묻었던 자들은 흙이 되었고 흙에 묻혔던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십니다. 세상은 강해 보이나 약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성도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삶의 현장에서 묻고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묻는 자는 자기가 묻히게 됩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을 알리는 자는 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기도제목

1) 고난주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시는 당회장 목사님을 위하여

2) 가족을 위하여

실천사항

1) 십자가에 달리신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금식합시다.

2) 텔레비젼, 신문 등을 하룻 동안 잊고 삽시다.

3) 열심히 교회 일을 하면서도 나의 욕심을 추구했거나 교만한

자세가 있었다면 반성하고 더욱 충성된 일꾼이 됩시다.

무덤속에 계신 예수님 [토요일]

찬 송

144장[예수 나를 위하여], 135장[갈보리 위에], 189장[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성 경

① 마태복음 27:62-66

말씀묵상

숨이 끊긴 예수님은 고요히 무덤 속에 누워 계십니다. 오히려 죽인 자들은 밤새 잠도 못 자며 지키고 섰습니다. 승리자로 자처했던 저들이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들에게는 피흘리신 예수님을 현장에서 보았지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하지 않으면 잠도 잘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기에 평안히 누워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평안합니다. 일시적인 걱정은 있어도 곧 이길 수 있고 다시금 평안이 있게 됩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릅니다. (요 14:27)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거기서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오히려 불안해 밤새 무덤을 지킵니다. 살아나신 주님과 함께 평안함을 누리십시오.

기도제목

1) 구역식구를 위해

2) 가족의 복음화를 위해

실천사항

1) 한번 이상 친절을 베풉시다.

2) 고요히 누워 계신 주님을 생각하며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3) 교회생활과 세상일을 하면서 보다 더 인내심을 기릅시다.

종려주일의 삶(종려주일)

이석권 목사

[성경본문] 사53:1-10

(사 53:1) 우리가 1)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요1:46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3)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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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난주간의 시작인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사순절의 절정기로서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고난 당하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말합니다. 모든 교인들은 이 기간을 통해서 경건과 절제, 금식과 회개, 자선과 구제를 통해 추상적인 이웃사랑이 현실적인 시혜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본받아야 하고 주가 가신 가시밭길을 말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떤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할까?

1.희롱 당하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예수 님은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후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피와 땀을 흘려 기도 하신 후 사랑하던 제자 가룟유다의 배신에 의해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대제자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서 온갖 곤욕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선 홍포를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군인들이나, 행정관, 또는 왕들이 입었던 망토와 같은 옷인데 주님을 놀리기 위해서 그 당시 황제들이 입는 자색 옷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홍포는 낡은 천으로 만들어서 금방 찢어질 것 같은 얇은 천이었는데 이 모두는 예수 님을 조롱하기 위한 짓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님의 머리에는 왕관 대신 가시로 만든 관을 씌워서 사람들에게 보임으로 부끄러움을 사게 했습니다. 그리고 갈대로 쳤습니다. 갈대는 그 당시 그곳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천하고 약한 풀이었습니다. 이토록 심한 조홍을 당하시고 난 후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후에 예수 님께서는 로마 군인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흉악한 두 강도와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멸시하고 침뱉던 빌라도 뜰에서 우리 주님은 인류를 죄악 속에서 구원하기 위한 장렬한 역사를 이루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주간만이라도 잃었던 예수를 다시 만나고 소홀했던 사명을 다시 잡아 헌신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사도, 복음의 나팔, 헌신의 일꾼, 구제의 천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십자가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두 번째로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머리로 죄짓고, 두 손과 두발로 범죄 할 때가 많습니다. 이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친히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또 예수 님이 죄악을 짊어지셨다고 말했는데 이 죄악은 원죄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진 죄악의 담을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모두 허물어뜨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심으로 인류의 죄가 청산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긍휼과 사랑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3.채찍에 맞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예수 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던 그 당시 로마에서는 사형수들에게 사형 집행을 하기 전에 채찍으로 때려고 고통을 가했습니다. 이 채찍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어떤 사형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기 전에 이 채찍을 맞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한 채찍은 손잡이가 짤막한 채찍인데 그 끝에는 여려 줄의 가죽 줄이 있고 그 가죽 줄 끝에는 날카롭고 예리한 쇠붙이나 아주 단단한 짐승의 뼈를 쪼개서 붙인 채찍이었습니다. 이 채찍으로 사람을 치면 채찍이 사람의 몸에 착착 감겼다가 끌어당기면 살점이 찢어지는 고통을 주는 채찍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채찍을 몸소 다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 님은 공생애를 통해 소망스런 하늘나라 복음은 물론 고통스러운 병자를 고치며 지탄받는 죄인을 용서하시어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치료와 용서와 축복과 은총을 베푸셔서 시험든 사람의 영혼과 낙심하는 자의 마음과 병든 사람의 육체와 실패한 자들의 재기와 성공을 위해 기적을 베풀고 계십니다. 예수 님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하늘나라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물과 피를 쏟으시고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못박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우연히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고 예수의 희생을 통해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선택받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구원 얻은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축복 받은 예배에 초대를 받으신 성도 여러분! 우리는 2천년 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간 자가 천국 가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께서 강림하시는 날 부활해서 주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받아 복된 삶을 사는 영광스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자기 영성개발로 신앙의 성장을 위해 금식하고 묵상하고 애통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를 힘써 단절되었던 예수와의 대화가 재개되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메가톤 급으로 폭발되어 구경꾼이 일꾼 되고, 말꾼이 충성된 사도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려주일, 고난주간 묵상자료(월-토)
종려주일, 고난주간 묵상자료(월-토)
종려주일, 고난주간 묵상자료(월-토)

by 아름다운 사람 2010. 3. 27. 15:30

종려주일 설교자료
종려주일 설교자료
종려주일 설교자료

복음서의 말씀 (막 11:1-11)으로 설교 작성 : 전개식 설교

제목 : 공허한 외침으로 가득 찬 인생?

『로마인의 이야기』에는 로마 개선장군의 입성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개선식이 있기 전까지는 로마 시내에 들어올 수 없었고, 성 밖에서 수십 일 혹은 수개월을 머물면서 개선식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치르고는 했다. 개선식은 개선한 장군에게도 대단한 영광이었지만 로마의 시민들 전부가 열광하는 대 잔치가 되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흰 백마를 타고 개선장군이 호위대에 둘러싸여 로마의 신전으로 이어지는 가도를 따라 들어설 때 시민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으며, 그의 휘하의 군단 병력들이 들어오고 또 수많은 전리품들과 포로들이 들어올 때면 대 로마제국의 자존심과 영광을 바라보며 온 시민들은 열광했다. 오랜 전투에서 생명을 걸고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싸운 전사들이 승리를 쟁취하고, 그 승리의 영광을 로마 시민들과 로마의 신들에게 바치는 하나의 예전이었다. 그 승리의 전사들에게 맘껏 박수를 보내고 환호를 보내는 것은 로마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였다고 생각한다.

Move 1 : 초라한 입성식

그에 비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승리의 입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고 초라한 행렬이었다. 규모나 모습에서도 그렇고, 그 행렬에 참가한 사람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시골 중고등학교의 가장행렬 비슷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탄다는 것은 탄 사람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고, 나귀 새끼에게도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을 태우는 데에 적절하게 훈련되지 않은 어린 나귀였기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 벽에 몸을 부비기도 하고, 아마 뒷발질도 했을 것이다.

타고 가는 나귀 위에는 그럴싸한 안장도 없고 적절한 장식도 없었다. 물론 호위병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말 위에는 허름한 옷이 깔려 있을 뿐이었고,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길에는 카펫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개선장군이 행진하는 그 길에는 붉은 카펫이 깔리고 길 주변은 아름다운 꽃과 화분들, 그리고 여러 깃발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예수님의 행진은 그렇지 못했다. 초라하지만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던 열렬한 지지자들은 로마의 개선식을 연상하며 카펫 대신에 그들의 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나아가시는 길에 깔았을 것이다. 아마도 앞서고 뒤서면서 옷을 걷어 와서 앞에 깔고 또 깔았을 것이며, 아마도 예수님은 그 타이밍을 위해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군중들도 없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므로 개선식 치고는 너무 초라해서, 궁여지책으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옆에 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호성을 보낸다. 그리고 구약의 말씀이 생각나“호산나”를 외치고 있었다.

Move 2 : 초라하지만 영광의 행렬

인간적으로 볼 때는 너무 초라한 행렬이고, 차라리 숨기고 싶은 그런 왜소한 모습이었지만, 사복음서 기자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초라한 사건이 계속해서 읽혀지고, 기억되고, 다시 들려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두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오늘 같은 종려주일이면 세계의 온 교회가 읽게 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초라한 행렬을 재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생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등극하시는 승리의 입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시는 평화의 왕의 등극이었다. 전쟁의 영웅들로 세워 지는 일은 그 배후에 얼마나 잔인한 학살이 자행된 다음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전쟁의 영웅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말을 탔지만,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은 나귀를 타셨다. 그것도 겸손히 새끼 나귀를 타셨다.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그 순간은 하늘과 땅이 잇대어지는 영광의 순간이었다. 하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적으로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Move 3 : 놀라운 헌신

그 영광의 입성을 위해 한 무명의 헌신자가 있어야 했다. 이 부분에 와서 주님은 나귀 좀 잠시 빌리자고 부탁하거나 애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당하게 주권 (主權)을 선언하고 있다. “주인이 쓰시겠다 하라!”주님은 만유의 주인(the Lord of everything)이심을 당당하게 외치고 계신다.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왕권’이며, ‘주권’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귀 주인이 순순히 그 나귀를 내어놓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그가 주님을 알고 있었는지, 혹 주님을 모셔 들인 그리스도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지만, 그 무명인은 놀라운 응답을 드리고 있다. 주님의 선언 앞에 자신의 귀한 것을 드려 헌신한 사람으로 인해 주님은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된다.

“주인”혹은 주님이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큐리오스”라는 말로 고백했던 이 말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이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인생도, 나의 가진 것도, 나의 모든 것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이것이 성숙한 교회의 모습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영광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 앞에 무명의 나귀 주인은 자신의 것을 내놓는다. 그냥 빌려 드리는 자세가 아니라 온전히 나귀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그의 계획도 접고, 그의 욕심도 접고, 그것을 선뜻 내어놓고 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것을 잠시 빌려 쓰다 가는 인생임을 이 무명의 그리스도 인은 얼마나 자세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 두고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쓰다 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것처럼 움켜쥐고 살다가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가는 부자를 가리켜서 ‘어리석다’고 말씀하신다(눅12:13-21). 주인처럼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한 무명의 신앙인은 이 점에 있어서 얼마나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가?“ 주님 것이오니, 주님 원하시는 대로 쓰셔야지요. 주님이 먼저 쓰셔야지요.”

이것은 우리 삶 가운데서 날마다 고백되어야 할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한 가지는 주님의 요청에 대해서 거절했다면 주님은 다른 사람의 나귀를 탔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이 놀라운 축복의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는 수천 번이고 그렇게 하길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Move 4 : 건강한 신앙인인가?

여기에서 제기하게 되는 중요한 질문 한 가지는 종려주일, 예수님의 초라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이 건강한 신앙인들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21세기를 전후하여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건강한 교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관심이다. 교회가 건강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라게 되어 있다. 성장하기 위해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건강한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하 게 된다.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교회들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은 다음의 사실들을 늘 점검하고, 그 부분에 있어서 바로 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계속해서 말씀으로 훈련받고 있는가?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나타내고 있는가?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위해 진정으로 헌신된 사람들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날 환호하던 그 사람들’은 건강한 신앙인들이며 건강한 예배자들이었는가? 아마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건강한 성도들이 아니었다. 결코 건강한 예배자들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마음은 다른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린 나귀의 헌신은 주님이 안락하게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데에는 너무나 부족한 헌신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지만 주님은 기뻐 받으셨다.

나귀의 자기 드림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있을 때 가치가 있다. 그가 대신 박수를 받으려고 한다거나, 그가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나서는 순간 그의 존재 가치는 이미 떨어지고 만다. 그가 힘들다고 예수님을 내려 놓는다면 그 순간 그의 존재 가치는 없어지고 만다. 예수를 담고 있는 순간, 교회는 귀한 것이 된다.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빠지면 모든 것이 빠져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수님을 모신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이다. 건강한 예배자들, 건강한 헌신자들이 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려주일 설교자료
종려주일 설교자료
종려주일 설교자료

by 아름다운 사람 2010. 3. 27. 15:28

종려주일 / 수난주일 설교지침
종려주일 / 수난주일 설교지침
종려주일 / 수난주일 설교지침

호산나를 힘 있게 외치면서

석의적 접근

구약의 말씀 사50:4-9상

구약의 본문은 성서일과의 3년 주기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말씀으로, 이사야 서가 담고 있는‘고난의 종의 노래들’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첫 번째 노래에는 하나님께서 종을 택하심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며, 두 번째 노래에 서는 고난의 종이 모태에서부터 이미 그의 사명이 결정되었음을 말씀한다. 세 번 째 노래는 고난 받는 종의 확신을 노래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주 여호와”에 대한 언급이 4번씩이나 거듭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난 받는 종의 고 백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4-5절에서는 그의 사명을 선언하고, 5-6절에서는 제자도를 위한 종의 연단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7-9절에서는 고난의 종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실성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 받는 종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사명을 잘 알고 있다(4절). 무엇보다도 그는 학자의 혀와 귀를 언급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그는 학자와 같이 잘 알아들 을 수 있어야 했으며, 그의 혀는 그가 들었던 그 말씀을 정교하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여기에서 고난의 종의‘듣는 것’과‘말하는 것’을 통한 사역은 특별한 주의를 끌고 있다. 그의 사역은 곤핍한 자들을 돕는 것이었으며, 세우는 것이었다(sustain). 포로생활에 지쳐서 곤핍해 있는 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국의 권세를 정복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귀한 사역을 위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학자의 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제 고난의 종은 반대와 모진 핍박에 직면한다. 모진 핍박은 육체적인 능욕과 사회적인 차별, 그리고 괴롭힘을 동반한다. 그러나 고난의 종은 그러한 압박에도 대항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여셨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에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확신의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타나는 고난의 종의 확신은 그 모든 시련으로부터 그를 강하게 해주었고, 오히려 담대하게 해주었다. 8-9절의 문장 양식은 법정에서의 변론체로 되어 있다. 이곳의 원어 문장들은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두 인물이 비교되고 있는데,“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8절)와“정죄할 자”(9절)가 그것이다. 고난의 종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그를 정죄하는 사악한 자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 가는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빌2:5-11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오늘의 유럽 지역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로 바울과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교회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감옥에서 편지를 써 보내고 있는데, 빌립보 교인들의 영적, 물질적 후원에 대한 감사와 교회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교훈을 주고자 함이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화합의 원천이며 믿음생활에서 바라보고 따라야 할 신앙의 푯대로 제시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성서 신학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데, 그들은 결국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대교회의 찬양이며,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여기

에는 5가지 정도의 기독론적 진술들이 담겨 있는데, 그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고백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재하심(Preexistence)에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둘째는 종의 메타포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겸손을 보여 준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고백이다. 죽으심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십자가는 세상을 위하여 당하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치욕을 잘 보여 준다.

넷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가 선언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완성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부활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를 선언하고 있다. 그분 앞에서 모든 무릎이 꿇게 될 것이며,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죽기까지 순종하심, 그리고 승리하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으며, 자신을 드리신 희생에는 인류를 살리시려는 거룩한 사랑이 담겨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들의 찬양은 마땅한 것이며, 그의 모습을 닮아감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

복음서의 말씀 막11:1-11

종려주일의 복음서 본문은 무리들이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지만, 예수님의 행동들을 증언했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잠시 동안의 환영이었음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은 불과 며칠 사이에 예수님을 반대하고 죽이라고 소리치며 대적하는 무리 속에 끼어든다. 예수님의 권능과 왕권이 강조되어지면서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아이러니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가는 11장에 들어오면서 이전까지 갈릴리에서의 활동을 끝내고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두 제자들을 보내시는데, 그들이 나귀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시면서 끌고 오도록 지시하신다. 예수님은 어디에 나귀가 묶여 있을 것인지와 끌고 오는 과정에서 어떠한 질문들이 주어질지, 그리고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다 알고 계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왕권에 대해 순종하는 아름다운 한 무명의 신앙인을 만나게 된다.“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 한 마디에 그의 소유를 내놓고 있는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실 때 마리아의 순종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순종은 이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의 드림은 왕에 대한 아름다운 헌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예수님의 권능을 강조하면서 본문은 예수님의 왕권(kingship) 역시 강조하고 있다. 길에 그들의 망토가 펼쳐지는 모습은 예후의 대관식에 그의 군대들이 행했던 모습을 기억나게 해준다(왕하 9:13). 예수님의 왕권과 연결해서 볼 때 가장 분명한 묘사는 시편 118편 26절에서 인용한 10절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누가는“왕”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반면, 마가는“다윗의 나라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제자들은 그분이 실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이심을 인식하게 된다. 누가는 그들의 찬양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한 바리새인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반면에, 마가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는 장면에 강조점을 둔다.

종려주일 / 수난주일 설교지침
종려주일 / 수난주일 설교지침
종려주일 / 수난주일 설교지침

by 아름다운 사람 2010. 3. 27. 15:26
저의 책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부록을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공개합니다.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가 없다고 우기는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부록 : 오늘날도 선지자와 사도가 존재하는가?

  오늘날도 선지자가 존재할까요? 어떤 이들은 지금은 선지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선지자는 구약시대에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가정 하에서 예언사역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공격하고 폄론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합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마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을 보낼 것이며 너희가 구박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보낸다는 것입니까? 구약시대입니까? 아닙니다. 과거시제가 아니라 미래시제(“구박하리라.”)를 사용했으므로 분명히 신약시대입니다.

  행 11: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이때는 구약시대가 아니라 분명히 신약시대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아가보는 훗날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라고 예언한 그 선지자입니다(행 21:11).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이처럼 안디옥 교회 한 교회 안에도 여러 명의 선지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교회의 중요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행 15:32-33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였다는 말은 그 당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런데 유다도 선지자고 실라도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이 두 선지자는 엉뚱한 예언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웠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라는 말에 단서가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의 권위 하에 있었으며 그 아래 거하며 순복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어디에 선지자를 세우셨다고요? 유대교가 아니라 “교회 중에” 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는 바로 교회시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선지자가 없다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고전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누가 자기를 선지자로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하여 착각한 것이다. 요즘 시대에 선지자가 어디 있냐?”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로 선지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그가 실제로 선지자라 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즉 지도자들의 권위와 지도 아래 있어야 함을 분명히 했습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이것이 구약시대의 유대교에 주어진 직분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신약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딛 1:12-13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예루살렘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또다시 여기 그레데인들 중에 있었던 무명의 선지자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당시 선지자들이 여러 지역에 두루 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계 11:3-10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미래인 7년대환난 때 일어날 일입니다. 두 증인은 그때 사역하게 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끝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에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한 10년 뒤에는 왕이 나타날까요? 아니요. 절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지나갔고 지금은 대통령이 통치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가 구약시대로 끝났다면 미래에 두 증인 즉 두 선지자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이것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언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이것이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증거가 됩니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가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참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이 없는데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참인 것처럼 가장하여 속일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니까 위폐가 있는 것이지, 돈이 없는데 어떻게 위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 선지자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명백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항상 선지자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선지자였고,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도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냈습니까? 제사장과 율법사들에게만 이스라엘 백성을 맡겨 놓았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것입니다. 다 망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들에게만 교회를 맡겨 놓으면 큰일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조차 회개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보다 못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꺼지지 않습니다. 식어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매시대마다 선지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장에서 나와 절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성경을 통해 충분히 증명한 것처럼, 지금도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수많은 선지자들이 존재합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존경하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비롯하여 밥 존스, 데이비드 윌커슨, 릭 조이너, 바비 코너, 신디 제이콥스, 마크 듀퐁, 샨 볼츠, 그래엄 쿡, 짐 골, 패트리샤 킹... 등 그 이름을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실제로 선지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국제적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수십 수백만의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요엘이 성경에서 교회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물론 이렇게 예언하는 모든 이들이 선지자는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이들 중 선지자로 만세 전에 선택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절대로 선지자가 없다는 무지한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종교적이 되어 선지자와 예언 사역을 공격하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선지자와 예언 사역을 수용하되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 하나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왜 예언이 100% 정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참 선지자들의 예언은 항상 100%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럴까요?

  예언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주로 이런 답변을 내놓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성령님이 모든 믿는 자들의 속에 내주하시지도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예언마저도 틀리면 어떤 기준도 없는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선지자들을 붙잡아 주셨고 그들의 예언은 정확했다. 반면에 신약시대에는 성경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령님이 각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신약의 신자들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분별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과 달리 신약시대의 예언은 100% 정확하지는 않다.’ 저는 이 대답이 틀린 대답이 아니며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약의 예언도 100% 정확하면 더 좋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신약의 선지자들을 구약시대처럼 붙잡아주시지 않는 걸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제가 가진 의문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드디어 이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두 가지로 답을 얻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이 책을 쓰던 도중 주의 성령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해답의 실마리는 요엘의 예언에 있었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소수의 선지자들에게만 임했습니다. 그들은 만세 전에 선지자로 선택된 자들이었고, 그리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의탁하사”라는 말에 나타나듯이 거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음의 비밀을 나눌 만큼 성숙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꼭 이런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는 요엘이 예언한 것처럼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집니다. 물론 그 중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거룩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에 속하는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거룩하거나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꼭 하나님께서 제한하셔서 라기보다는 부득불 예언이 부정확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이와 같이 바울은 예언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언이 항상 정확하다면 분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이 다 정확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항상 100% 정확하지 않은 것은 성경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운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거룩해지면 됩니다. 그들처럼 주님과 친밀해지고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그러면 아가보 선지자처럼 신약시대에도 항상 정확한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의 답은,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책을 통해서 얻었습니다. 이 책은 사도, 선지자, 목사에 관한 성경의 관점을 소개한 책인데 목회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은사 사역자들에게 필독서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언은 방언처럼 언제나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왕하 3:11-16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있도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예언은 베드로가 말한 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조차 바로 예언하지 못하고 거문고를 탈 자를 불러와서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비로소 예언했습니다.

  렘 42:1-7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이와 같이 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예레미야도 묻는 것에 대해 바로 예언하지 않고 기도하고 기다리다가 10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 예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언제나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 릭 조이너 목사님의 책을 번역한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릭 조이너 목사님을 만나서 기도 받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기대감을 가지고 릭 조이너에게 예언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릭 조이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예언은 내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오래 전부터 이렇게 가르쳐오셨습니다. 그리고 신간에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을 얹을 때마다 예언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소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예언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선지자 직임은 그 분이 뜻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영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믿는 자들은 심지어 성령의 촉구하심을 받지 않을지라도 예언할 수 있으며, 방언을 말할 수 있으며, 그리고 마음대로 통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모방하여 전적으로 육으로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언의 정확성을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만약 예언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주권적인 감동과 함께 계시가 주어질 때만 예언을 한다면 그 정확성이 놀랄 정도로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선지자들과 예언사역자들은 성령의 감동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사역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며 우리 교회의 예언사역에도 이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언사역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의 예언사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지침을 주었습니다.

  첫째, 예언사역이 있는 날 영적 상태가 좋지 않고 성령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사역자는 자진해서 그날 예언사역을 하지 않는다.

  둘째, 성령 충만하여 예언사역에 임한 사역자라도 의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언의 말씀을 나누어주지는 않는다. 예언이 주어지는 사람에게는 예언하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축복기도를 해주고 보낸다.


  끝으로, 선지자에 대해서 꼭 드릴 말씀은 선지자는 단순히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쓴 글을 보십시오.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그 외 다른 예언서들을 보십시오. 그 중 상당수의 내용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에게 직접 하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신약의 교회들을 위해서 세우신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설교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이든 반드시 말씀에 정통해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독서를 많이 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일정 수준 이상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실력 있는 설교자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선지자도 보통은 계시적이고 영감에 넘치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사역하다가 성령의 감동이 임하고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에만 예언해야 합니다. 마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치유사역을 할 때 기름부음이 있을 때는 기름부음으로 사역하다가 기름부음이 떨어지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역하듯이, 선지자도 예언의 특별한 기름부음이 없을 때는 가르침으로 사역하고 예언의 기름 부으심이 임할 때에만 예언하며 사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육으로 사역하지 않고 정말 영으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예언과 계시를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효과적으로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지자는 오늘날도 존재합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떨까요? 사도 역시 지금까지도 존재할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처럼 사도에 대해서도 지금은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케네스 해긴, 피터 와그너, 빌 해몬, 데이빗 캐니스트러시,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등 많은 분들의 수고에 의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상태입니다. 그러면 새로워 보이는 이 주장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장 2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은 절대 사도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중 누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금은 사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도의 자격이 아니라 어린양 12사도의 자격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양의 12사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해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 21:13-14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이처럼 어린양 12사도는 특별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어린양의 12사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그는 여전히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모든 사도의 자격이라면 바울도 사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사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린양 12사도의 자격이지 모든 사도의 자격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12사도와 같은 사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사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와 선지자가 모두 성경의 완성을 위해 세움 받은 자는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중에도 성경을 단 한 권도 기록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도가 아닌데도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볼 때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의 사명이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세기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성도는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봉사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즉 사도의 역할이 아직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의 직분이 1세기에, 혹은 교회사의 중간에 끝날 수 있겠습니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주셨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이런 사역들은 지금은 없어져버렸어요. 오늘날 남아있는 사역들은 교사와 목사와 전도자뿐이에요. 오늘날 사도나 선지자는 없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과 세우는 일에 부르셨다고 했습니다(엡 4:11-12). 모든 성도가 이미 온전케 되었습니까?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사역이 있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 아직도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사역들과 섬기는 은사들은 지금도 역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도의 직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교회를 위해 사도들을 보내고 계시며 지금도 진정한 사도들이 존재합니다. 사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한편,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쯤 제가 춘천에서 목회하는 저의 동기 목사님의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지금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 시절 항상 1등을 도맡아했던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펴서 다음 부분을 읽어주었습니다.

  엡 3:4-5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러면서 “이 구절에는 당시의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해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선지자는 그 당시만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과연 장학생답게 예리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지적에 대해서 올바른 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한 의문을 마음에 묻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힘써 연구한다고 항상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출판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서 비로소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1987년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교회 안에 친히 확립하신 사역의 은사들에 대해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는 네 가지의 등급 또는 서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서열이나 등급 안에서, 사도들은 서로 다른 분량의 기름 부으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의 첫 번째 서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도뿐 아니라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요 3:34). 예수님이 가지셨던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은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어린양의 사도들입니다. 즉 맛디아를 포함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인데 사도 바울도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비토대적인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사도들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중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대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바로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등급입니다. 이 서열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그들도 역시 신약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1987년 방문에서 예수님은 또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대적인 사도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이 등급 또는 수준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신약성경의 교리적 토대를 놓기 위해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와 선지자들은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복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인 이 세 번째 서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령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엡 3:4-5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바울은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여진 토대 위에 쌓아올리기만 합니다.

  엡 2:19-20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은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토대 위에 쌓여져가야 합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아무도 오늘날 복음의 기초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바울은, 이미 놓여진 기초 위에 우리가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고전 3:10). 우리는 그것에 뭔가를 더할 수도 뭔가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방문에서 예수님은 저에게 매우 재미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오늘날에는 기초를 놓는 사도들도 없고, 기초를 놓는 선지자들도 없단다. 오늘날에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 또는 권위와 같은 서열, 또는 같은 정도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아무도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에 속해 있지 않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 글은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에베소서 3장 4-5절에 관한 저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래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해긴 목사님의 말대로, 오늘날 토대적인 사도들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들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관해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 등급의 사도와 선지자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보다는 더 낮은 서열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입니다...

  고대 헬라어에서 ‘사도’라는 말은 명사로서 위임받은 사자, 또는 대사를 의미했습니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은 사도라고 불리워졌는데, 왜냐하면 그는 어떤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특별히 보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을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네 번째 서열에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주어서 교회에 보내시는데, 어떤 성경적인 계보를 따라 믿는 자들을 분발시키려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은 단지 그 일을 행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을 특별히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에 어떤 메시지나 사역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스미스 위글스워스를 ‘믿음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보냄 받은 자’로 부르신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에 단지 한 가지 특별한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도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 교회 때에는 토대적인 사도와 비토대적인 사도, 두 종류의 사도가 존재했습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사도였고, 바나바는 비토대적인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토대적인 사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토대적인 사도들뿐입니다. 또 토대적인 사도들 중에도 바울이나 어린양 12사도 중 베드로나 요한처럼 말씀이 강한 사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도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이처럼 토대적인 사도는 아니지만 성경의 진리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대로 분별하고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허물어진 교회의 토대를 다시 원래대로 보수하는 그런 사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존 웨슬리와 찰스 피니가 그런 분이고, 케네스 해긴이나 릭 조이너 역시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 일에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책 “다림줄”에 소개한 신학생 시절 어느 여전도사님이 기도원에서 함께 기도하다가 말씀의 은사에 대해 받은 응답이나 제 친구 샨 볼츠가 영동제일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때 도왔던 고위층 천사를 보고 제게 예언한 것도 바로 그런 기름부음을 뜻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즉 성경 이외에 무슨 계시를 받아 토대를 새로 세우거나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이단입니다.) 이미 토대적인 사도들을 통해 완성된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교하므로 그 토대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기름부음이라고 이해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과 2장 6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전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바울이 본인만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인데 1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린양의 12사도 혹은 바울과 바나바에서 사도의 계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과 바나바 다음 세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실라와 디모데 뒤에는 사도가 끝났을까요? 아니요.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증거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사도도 오늘날 존재합니다.

  그럼 사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사도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상태이지만 사도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사도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선 아직 충분하게 규명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도수가 700명 이상 되면 그 목사는 틀림없이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아닌 복음전도자 혹은 목사나 교사라도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분들은 능히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빌립이 그 한 예입니다. 빌립은 분명 사도가 아니라 복음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얼마나 큰 무리를 주께로 이끌었습니까? 또, 우리나라에 강해설교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 중에도 1,000명이 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다 사도일까요? 과연 그분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이 피터 와그너 박사가 말하는 ‘신사도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교회도 없잖아 있겠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사도성을 교회를 세우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누가 자기를 사도라고 주장하면 교회를 몇 개 세웠는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사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도의 표라 불리워지는 표적과 기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대로 그것은 사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들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가 어떤 사람을 사도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사도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표적과 기사라면 복음전도자가 더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예수님과 12제자 그리고 바울의 사역 속에 나타난 놀라운 표적과 기적이 꼭 사도라서 라기 보다는 그분들이 강력한 복음전도자의 기름부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실제로 복음전도를 하는 현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이유 때문에 70인 제자들이 사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귀신 쫓고 병 고치는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 것 아니겠습니까?

  막 16:15-18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이 말씀과 전도자 빌립의 사역에 잘 나타나듯이 표적과 기적은 사도의 사역보다 복음전도자의 사역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가 다 강력한 표적과 기사의 사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쩌면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었던 야고보 같은 사도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강력한 표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나 다른 사도들보다 오히려 전도자 빌립이 더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을 사도로 특징지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도성은 무엇일까요? 요즘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에 대한 이해가 제게 점차 증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가 무엇이냐? 하면, 사도는 지혜로운 건축자입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바울은 사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엡 2:20). 즉 사도란 터를 닦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른 이” 고린도전서 3장이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들에 대한 장임을 감안할 때, 다른 사역자들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도는 지혜로운 건축자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혼자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기술자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건물을 지어갑니다. 마치 사도가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와 힘을 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엡 4:11-12)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미장이나 다른 건축 기술자들과 다른 것은 건물 전체에 대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건물에 대한 청사진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술자들에게 일을 맡기고 감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의 주요 역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도성입니다. 진정으로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이런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관한, 교회에 관한, 사역에 관한 성경적이고 영감이 넘치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이렇게 세워야 한다, 사역은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실질적인 분별과 지도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성경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예루살렘 회의’와 ‘바울서신’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사도들이 장로와 함께 모여서 예수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가르쳐야 하는지 교리와 규범을 정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란 교리와 사역자와 교회에 대한 재판을 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이런 일들을 학자나 이단 사냥꾼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고 사도들이 할 일입니다. 그래야 바른 교리를 갖게 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했던 재판처럼 불의한 재판이 아니라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짐으로 교회 안에 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교단을 보더라도 왜곡되지 않고 성경적으로 바른 교리는 갖고 있는 것은 존 웨슬리에 의해 세워진 감리교나 에이미 샘플 멕퍼슨에 의해 세워진 퀘이커교처럼 학자풍의 지도자가 아니라 강력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단이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어떤 사도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도들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가 보여주는 실제입니다.

  바울서신은 사도에 대한 더 분명한 개념과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할 때 성령께서 제 영에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울서신의 첫 머리에 보면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엡 1:1)이라고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에 저는 이것이 단지 발신자를 밝히는 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게 말씀했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사말이 아니라 바울이 사도로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쓰고 있으며, 현재 사도 사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는 사도가 무엇이지를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바울서신들을 주의해서 보거라. 그러면 사도가 무엇인지, 사도의 책무가 무엇이며, 사도사역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바울서신을 예의주시함으로써 사도가 무엇인지, 사도의 책무가 무엇이며 사도 사역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각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어떤 것이 바른 교리인지, 올바른 교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에 나오는 칭의, 성화, 영화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또,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라고 출교시켜야 할 자를 출교시키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심지어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각 교회에 편지를 써서 칭찬과 책망과 위로와 권면을 하며 그 교회의 현안과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편지를 써서 멘토링을 합니다. 제가 생각나는 대로 임의로 몇 가지를 지목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갑자기 사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밀물처럼 밀려오지 않습니까? 사도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단순히 직책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영적 지혜로 분별력 그리고 성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저는 이것이 모든 사도의 특징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와는 다른 종류의 사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특징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합니다. 주님은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워서 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교회는 균형을 잃어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주로 목사와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제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짓 사도, 혹은 자칭 사도가 아닌 그리고 진정한 사도라도 일반적인 사도가 아니라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게 될 것이며 미래가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성령의 늦은 비가 강력하게 내려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진정한 사도들이 일어나고 특히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일어나도록 잊지 말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문제를 잠깐 언급하는 것이 지혜일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도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이냐? 에 대해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도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목사라고 하는 것이 교만도 아니고 당연한 것이듯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에선 임직식을 통해 사도와 선지자를 남발하고 이름뿐인 사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칭 사도 즉 거짓 사도들도 많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열방의 사도’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아는데 그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거짓된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사역은 어떤 직분으로 불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어떠한 능력을 주셨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떤 직함으로 부르며 돌아다니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능력 즉 실제적인 사역과 기름부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칭에 연연하지 말고 실제적이 되어야 합니다. 해긴 목사님은 스스로를 사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당신은 교회를 몇 개나 세우셨습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도는 교회를 세우는 능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면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도 중의 한 분은 모잠비크에서 짧은 시간 내에 8,000여 교회를 세운 하이디 베이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이디 베이커는 “사랑이 강권하시도다”라는 제목이 새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모잠비크에 계신 우리 목사님들은 좋은 옷이나 가죽 구두가 없습니다. 그들은 흙집에 삽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도’나 ‘목사’라 부르는 대신 ‘파파’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 놓은’(행 17:6) 초대교회 사도들과 비슷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믿음의 영웅 가운데 한 분은 마마 다누에카입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셋이나 살렸고 파파 다누에카와 함께 한 지역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곳마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따라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감투나 자리가 아닙니다. 사도는 실제적인 기능입니다. 능력과 기름 부음과 사역입니다. 자신을 사도라고 떠벌리지만 사실은 사도가 아닐 수도 있고 자신을 가리켜 한 번도 사도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가 강력한 사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명칭에 연연하지 말고 실제적인 사도의 기름부음을 사모하는 자가 됩시다.


by 아름다운 사람 2010. 3. 27. 15:12
저(변승우 목사)의 책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부록을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공개합니다.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가 없다고 우기는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부록 : 오늘날도 선지자와 사도가 존재하는가?

  오늘날도 선지자가 존재할까요? 어떤 이들은 지금은 선지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선지자는 구약시대에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가정 하에서 예언사역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공격하고 폄론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합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마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을 보낼 것이며 너희가 구박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보낸다는 것입니까? 구약시대입니까? 아닙니다. 과거시제가 아니라 미래시제(“구박하리라.”)를 사용했으므로 분명히 신약시대입니다.

  행 11: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이때는 구약시대가 아니라 분명히 신약시대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아가보는 훗날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라고 예언한 그 선지자입니다(행 21:11).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이처럼 안디옥 교회 한 교회 안에도 여러 명의 선지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교회의 중요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행 15:32-33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였다는 말은 그 당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런데 유다도 선지자고 실라도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이 두 선지자는 엉뚱한 예언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웠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라는 말에 단서가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의 권위 하에 있었으며 그 아래 거하며 순복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어디에 선지자를 세우셨다고요? 유대교가 아니라 “교회 중에” 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는 바로 교회시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선지자가 없다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고전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누가 자기를 선지자로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하여 착각한 것이다. 요즘 시대에 선지자가 어디 있냐?”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로 선지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그가 실제로 선지자라 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즉 지도자들의 권위와 지도 아래 있어야 함을 분명히 했습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이것이 구약시대의 유대교에 주어진 직분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신약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딛 1:12-13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예루살렘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또다시 여기 그레데인들 중에 있었던 무명의 선지자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당시 선지자들이 여러 지역에 두루 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계 11:3-10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미래인 7년대환난 때 일어날 일입니다. 두 증인은 그때 사역하게 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끝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에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한 10년 뒤에는 왕이 나타날까요? 아니요. 절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지나갔고 지금은 대통령이 통치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가 구약시대로 끝났다면 미래에 두 증인 즉 두 선지자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이것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언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이것이 지금도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증거가 됩니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가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참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이 없는데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참인 것처럼 가장하여 속일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니까 위폐가 있는 것이지, 돈이 없는데 어떻게 위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 선지자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명백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항상 선지자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선지자였고,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도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냈습니까? 제사장과 율법사들에게만 이스라엘 백성을 맡겨 놓았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것입니다. 다 망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들에게만 교회를 맡겨 놓으면 큰일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조차 회개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보다 못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꺼지지 않습니다. 식어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매시대마다 선지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장에서 나와 절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성경을 통해 충분히 증명한 것처럼, 지금도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수많은 선지자들이 존재합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존경하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비롯하여 밥 존스, 데이비드 윌커슨, 릭 조이너, 바비 코너, 신디 제이콥스, 마크 듀퐁, 샨 볼츠, 그래엄 쿡, 짐 골, 패트리샤 킹... 등 그 이름을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실제로 선지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국제적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수십 수백만의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요엘이 성경에서 교회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물론 이렇게 예언하는 모든 이들이 선지자는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이들 중 선지자로 만세 전에 선택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절대로 선지자가 없다는 무지한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종교적이 되어 선지자와 예언 사역을 공격하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선지자와 예언 사역을 수용하되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 하나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왜 예언이 100% 정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참 선지자들의 예언은 항상 100%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럴까요?

  예언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주로 이런 답변을 내놓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성령님이 모든 믿는 자들의 속에 내주하시지도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예언마저도 틀리면 어떤 기준도 없는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선지자들을 붙잡아 주셨고 그들의 예언은 정확했다. 반면에 신약시대에는 성경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령님이 각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신약의 신자들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분별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과 달리 신약시대의 예언은 100% 정확하지는 않다.’ 저는 이 대답이 틀린 대답이 아니며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약의 예언도 100% 정확하면 더 좋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신약의 선지자들을 구약시대처럼 붙잡아주시지 않는 걸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제가 가진 의문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드디어 이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두 가지로 답을 얻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이 책을 쓰던 도중 주의 성령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해답의 실마리는 요엘의 예언에 있었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소수의 선지자들에게만 임했습니다. 그들은 만세 전에 선지자로 선택된 자들이었고, 그리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의탁하사”라는 말에 나타나듯이 거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음의 비밀을 나눌 만큼 성숙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꼭 이런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는 요엘이 예언한 것처럼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집니다. 물론 그 중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거룩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에 속하는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거룩하거나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꼭 하나님께서 제한하셔서 라기보다는 부득불 예언이 부정확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이와 같이 바울은 예언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언이 항상 정확하다면 분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이 다 정확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항상 100% 정확하지 않은 것은 성경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운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거룩해지면 됩니다. 그들처럼 주님과 친밀해지고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그러면 아가보 선지자처럼 신약시대에도 항상 정확한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의 답은,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책을 통해서 얻었습니다. 이 책은 사도, 선지자, 목사에 관한 성경의 관점을 소개한 책인데 목회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은사 사역자들에게 필독서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언은 방언처럼 언제나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왕하 3:11-16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있도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예언은 베드로가 말한 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조차 바로 예언하지 못하고 거문고를 탈 자를 불러와서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비로소 예언했습니다.

  렘 42:1-7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이와 같이 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예레미야도 묻는 것에 대해 바로 예언하지 않고 기도하고 기다리다가 10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 예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언제나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 릭 조이너 목사님의 책을 번역한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릭 조이너 목사님을 만나서 기도 받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기대감을 가지고 릭 조이너에게 예언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릭 조이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예언은 내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오래 전부터 이렇게 가르쳐오셨습니다. 그리고 신간에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을 얹을 때마다 예언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소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예언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선지자 직임은 그 분이 뜻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영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믿는 자들은 심지어 성령의 촉구하심을 받지 않을지라도 예언할 수 있으며, 방언을 말할 수 있으며, 그리고 마음대로 통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모방하여 전적으로 육으로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언의 정확성을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만약 예언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주권적인 감동과 함께 계시가 주어질 때만 예언을 한다면 그 정확성이 놀랄 정도로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선지자들과 예언사역자들은 성령의 감동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사역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며 우리 교회의 예언사역에도 이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언사역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의 예언사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지침을 주었습니다.

  첫째, 예언사역이 있는 날 영적 상태가 좋지 않고 성령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사역자는 자진해서 그날 예언사역을 하지 않는다.

  둘째, 성령 충만하여 예언사역에 임한 사역자라도 의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언의 말씀을 나누어주지는 않는다. 예언이 주어지는 사람에게는 예언하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축복기도를 해주고 보낸다.


  끝으로, 선지자에 대해서 꼭 드릴 말씀은 선지자는 단순히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쓴 글을 보십시오.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그 외 다른 예언서들을 보십시오. 그 중 상당수의 내용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에게 직접 하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신약의 교회들을 위해서 세우신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설교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이든 반드시 말씀에 정통해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독서를 많이 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일정 수준 이상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실력 있는 설교자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선지자도 보통은 계시적이고 영감에 넘치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사역하다가 성령의 감동이 임하고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에만 예언해야 합니다. 마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치유사역을 할 때 기름부음이 있을 때는 기름부음으로 사역하다가 기름부음이 떨어지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역하듯이, 선지자도 예언의 특별한 기름부음이 없을 때는 가르침으로 사역하고 예언의 기름 부으심이 임할 때에만 예언하며 사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육으로 사역하지 않고 정말 영으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예언과 계시를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효과적으로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지자는 오늘날도 존재합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떨까요? 사도 역시 지금까지도 존재할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처럼 사도에 대해서도 지금은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케네스 해긴, 피터 와그너, 빌 해몬, 데이빗 캐니스트러시,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등 많은 분들의 수고에 의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상태입니다. 그러면 새로워 보이는 이 주장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장 2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은 절대 사도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중 누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금은 사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도의 자격이 아니라 어린양 12사도의 자격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양의 12사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해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 21:13-14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이처럼 어린양 12사도는 특별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어린양의 12사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그는 여전히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모든 사도의 자격이라면 바울도 사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사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린양 12사도의 자격이지 모든 사도의 자격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12사도와 같은 사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사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와 선지자가 모두 성경의 완성을 위해 세움 받은 자는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중에도 성경을 단 한 권도 기록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도가 아닌데도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볼 때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의 사명이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세기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성도는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봉사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즉 사도의 역할이 아직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의 직분이 1세기에, 혹은 교회사의 중간에 끝날 수 있겠습니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주셨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이런 사역들은 지금은 없어져버렸어요. 오늘날 남아있는 사역들은 교사와 목사와 전도자뿐이에요. 오늘날 사도나 선지자는 없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로, 어떤 이들은 교사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과 세우는 일에 부르셨다고 했습니다(엡 4:11-12). 모든 성도가 이미 온전케 되었습니까?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사역이 있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 아직도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사역들과 섬기는 은사들은 지금도 역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도의 직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교회를 위해 사도들을 보내고 계시며 지금도 진정한 사도들이 존재합니다. 사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한편,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쯤 제가 춘천에서 목회하는 저의 동기 목사님의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지금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 시절 항상 1등을 도맡아했던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펴서 다음 부분을 읽어주었습니다.

  엡 3:4-5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러면서 “이 구절에는 당시의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해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선지자는 그 당시만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과연 장학생답게 예리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지적에 대해서 올바른 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한 의문을 마음에 묻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힘써 연구한다고 항상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출판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서 비로소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1987년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교회 안에 친히 확립하신 사역의 은사들에 대해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는 네 가지의 등급 또는 서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서열이나 등급 안에서, 사도들은 서로 다른 분량의 기름 부으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의 첫 번째 서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도뿐 아니라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요 3:34). 예수님이 가지셨던 한량없는 성령의 기름부음은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어린양의 사도들입니다. 즉 맛디아를 포함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인데 사도 바울도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비토대적인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사도들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중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대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다른 토대적인 사도들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바로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등급입니다. 이 서열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그들도 역시 신약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1987년 방문에서 예수님은 또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대적인 사도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이 등급 또는 수준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신약성경의 교리적 토대를 놓기 위해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와 선지자들은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복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인 이 세 번째 서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령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엡 3:4-5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바울은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여진 토대 위에 쌓아올리기만 합니다.

  엡 2:19-20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놓은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토대 위에 쌓여져가야 합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아무도 오늘날 복음의 기초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바울은, 이미 놓여진 기초 위에 우리가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고전 3:10). 우리는 그것에 뭔가를 더할 수도 뭔가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방문에서 예수님은 저에게 매우 재미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오늘날에는 기초를 놓는 사도들도 없고, 기초를 놓는 선지자들도 없단다. 오늘날에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 또는 권위와 같은 서열, 또는 같은 정도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아무도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에 속해 있지 않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 글은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에베소서 3장 4-5절에 관한 저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래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해긴 목사님의 말대로, 오늘날 토대적인 사도들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들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에 관해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 등급의 사도와 선지자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보다는 더 낮은 서열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입니다...

  고대 헬라어에서 ‘사도’라는 말은 명사로서 위임받은 사자, 또는 대사를 의미했습니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은 사도라고 불리워졌는데, 왜냐하면 그는 어떤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특별히 보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을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네 번째 서열에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주어서 교회에 보내시는데, 어떤 성경적인 계보를 따라 믿는 자들을 분발시키려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은 단지 그 일을 행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네 번째 서열의 사도들을 특별히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에 어떤 메시지나 사역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스미스 위글스워스를 ‘믿음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보냄 받은 자’로 부르신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에 단지 한 가지 특별한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도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 교회 때에는 토대적인 사도와 비토대적인 사도, 두 종류의 사도가 존재했습니다. 바울은 토대적인 사도였고, 바나바는 비토대적인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토대적인 사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토대적인 사도들뿐입니다. 또 토대적인 사도들 중에도 바울이나 어린양 12사도 중 베드로나 요한처럼 말씀이 강한 사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도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이처럼 토대적인 사도는 아니지만 성경의 진리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대로 분별하고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허물어진 교회의 토대를 다시 원래대로 보수하는 그런 사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존 웨슬리와 찰스 피니가 그런 분이고, 케네스 해긴이나 릭 조이너 역시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 일에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책 “다림줄”에 소개한 신학생 시절 어느 여전도사님이 기도원에서 함께 기도하다가 말씀의 은사에 대해 받은 응답이나 제 친구 샨 볼츠가 영동제일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때 도왔던 고위층 천사를 보고 제게 예언한 것도 바로 그런 기름부음을 뜻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즉 성경 이외에 무슨 계시를 받아 토대를 새로 세우거나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이단입니다.) 이미 토대적인 사도들을 통해 완성된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교하므로 그 토대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기름부음이라고 이해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과 2장 6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전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바울이 본인만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인데 1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린양의 12사도 혹은 바울과 바나바에서 사도의 계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과 바나바 다음 세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실라와 디모데 뒤에는 사도가 끝났을까요? 아니요.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증거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사도도 오늘날 존재합니다.

  그럼 사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사도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상태이지만 사도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사도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선 아직 충분하게 규명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도수가 700명 이상 되면 그 목사는 틀림없이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아닌 복음전도자 혹은 목사나 교사라도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분들은 능히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빌립이 그 한 예입니다. 빌립은 분명 사도가 아니라 복음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얼마나 큰 무리를 주께로 이끌었습니까? 또, 우리나라에 강해설교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 중에도 1,000명이 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다 사도일까요? 과연 그분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이 피터 와그너 박사가 말하는 ‘신사도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교회도 없잖아 있겠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사도성을 교회를 세우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누가 자기를 사도라고 주장하면 교회를 몇 개 세웠는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사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도의 표라 불리워지는 표적과 기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대로 그것은 사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들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가 어떤 사람을 사도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사도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표적과 기사라면 복음전도자가 더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예수님과 12제자 그리고 바울의 사역 속에 나타난 놀라운 표적과 기적이 꼭 사도라서 라기 보다는 그분들이 강력한 복음전도자의 기름부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실제로 복음전도를 하는 현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이유 때문에 70인 제자들이 사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귀신 쫓고 병 고치는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 것 아니겠습니까?

  막 16:15-18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이 말씀과 전도자 빌립의 사역에 잘 나타나듯이 표적과 기적은 사도의 사역보다 복음전도자의 사역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가 다 강력한 표적과 기사의 사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쩌면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었던 야고보 같은 사도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강력한 표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나 다른 사도들보다 오히려 전도자 빌립이 더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을 사도로 특징지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도성은 무엇일까요? 요즘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에 대한 이해가 제게 점차 증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가 무엇이냐? 하면, 사도는 지혜로운 건축자입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바울은 사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엡 2:20). 즉 사도란 터를 닦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른 이” 고린도전서 3장이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들에 대한 장임을 감안할 때, 다른 사역자들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도는 지혜로운 건축자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혼자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기술자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건물을 지어갑니다. 마치 사도가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와 힘을 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엡 4:11-12)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미장이나 다른 건축 기술자들과 다른 것은 건물 전체에 대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건물에 대한 청사진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술자들에게 일을 맡기고 감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의 주요 역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도성입니다. 진정으로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이런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관한, 교회에 관한, 사역에 관한 성경적이고 영감이 넘치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이렇게 세워야 한다, 사역은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실질적인 분별과 지도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성경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예루살렘 회의’와 ‘바울서신’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사도들이 장로와 함께 모여서 예수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가르쳐야 하는지 교리와 규범을 정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란 교리와 사역자와 교회에 대한 재판을 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이런 일들을 학자나 이단 사냥꾼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고 사도들이 할 일입니다. 그래야 바른 교리를 갖게 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했던 재판처럼 불의한 재판이 아니라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짐으로 교회 안에 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교단을 보더라도 왜곡되지 않고 성경적으로 바른 교리는 갖고 있는 것은 존 웨슬리에 의해 세워진 감리교나 에이미 샘플 멕퍼슨에 의해 세워진 퀘이커교처럼 학자풍의 지도자가 아니라 강력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단이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어떤 사도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도들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가 보여주는 실제입니다.

  바울서신은 사도에 대한 더 분명한 개념과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할 때 성령께서 제 영에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울서신의 첫 머리에 보면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엡 1:1)이라고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에 저는 이것이 단지 발신자를 밝히는 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게 말씀했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사말이 아니라 바울이 사도로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쓰고 있으며, 현재 사도 사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는 사도가 무엇이지를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바울서신들을 주의해서 보거라. 그러면 사도가 무엇인지, 사도의 책무가 무엇이며, 사도사역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바울서신을 예의주시함으로써 사도가 무엇인지, 사도의 책무가 무엇이며 사도 사역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각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어떤 것이 바른 교리인지, 올바른 교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에 나오는 칭의, 성화, 영화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또,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라고 출교시켜야 할 자를 출교시키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심지어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각 교회에 편지를 써서 칭찬과 책망과 위로와 권면을 하며 그 교회의 현안과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편지를 써서 멘토링을 합니다. 제가 생각나는 대로 임의로 몇 가지를 지목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갑자기 사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밀물처럼 밀려오지 않습니까? 사도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단순히 직책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영적 지혜로 분별력 그리고 성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저는 이것이 모든 사도의 특징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와는 다른 종류의 사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특징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합니다. 주님은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워서 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교회는 균형을 잃어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주로 목사와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제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짓 사도, 혹은 자칭 사도가 아닌 그리고 진정한 사도라도 일반적인 사도가 아니라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게 될 것이며 미래가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성령의 늦은 비가 강력하게 내려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진정한 사도들이 일어나고 특히 바울과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일어나도록 잊지 말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문제를 잠깐 언급하는 것이 지혜일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도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이냐? 에 대해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도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목사라고 하는 것이 교만도 아니고 당연한 것이듯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에선 임직식을 통해 사도와 선지자를 남발하고 이름뿐인 사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칭 사도 즉 거짓 사도들도 많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열방의 사도’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아는데 그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거짓된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사역은 어떤 직분으로 불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어떠한 능력을 주셨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떤 직함으로 부르며 돌아다니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능력 즉 실제적인 사역과 기름부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칭에 연연하지 말고 실제적이 되어야 합니다. 해긴 목사님은 스스로를 사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당신은 교회를 몇 개나 세우셨습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도는 교회를 세우는 능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면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도 중의 한 분은 모잠비크에서 짧은 시간 내에 8,000여 교회를 세운 하이디 베이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이디 베이커는 “사랑이 강권하시도다”라는 제목이 새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모잠비크에 계신 우리 목사님들은 좋은 옷이나 가죽 구두가 없습니다. 그들은 흙집에 삽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도’나 ‘목사’라 부르는 대신 ‘파파’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 놓은’(행 17:6) 초대교회 사도들과 비슷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믿음의 영웅 가운데 한 분은 마마 다누에카입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셋이나 살렸고 파파 다누에카와 함께 한 지역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곳마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따라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감투나 자리가 아닙니다. 사도는 실제적인 기능입니다. 능력과 기름 부음과 사역입니다. 자신을 사도라고 떠벌리지만 사실은 사도가 아닐 수도 있고 자신을 가리켜 한 번도 사도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가 강력한 사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명칭에 연연하지 말고 실제적인 사도의 기름부음을 사모하는 자가 됩시다.


by 아름다운 사람 2010. 3. 27. 15:12